겨울의 시/신진
겨울의 시/ 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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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처
신진, 『미련』, 시산맥사, 2014.4
보고서
어리석은 이는
어리석은 줄 모르니 시끄럽고
지혜로운 이는
지혜로운 줄 모르니 말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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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처
신진, 『풍경에서 순간으로』, 도서출판 북인, 2010.12
배추
진눈깨비 내릴 무렵
거창하게 벌어지는 녹색 꽃, 배추.
그 향기에 안식구 배앓이 멎을 때면
겨울 가뭄이 오고,
마른 겨울 땅에 부리 박은 채
마냥 벌어지던 이파리, 세워 묶는다.
서로 추위되지 않으려고
배추는 저들끼리 녹인다. 껴안는다.
아침이면
녹색 연꽃 봉오리로 서리 밭에 줄을 맞추고
저녁이면 산엣 사람이 되어, 저마다
공중 부양해 보인다.
이윽고 김장 칼이 텀벙 자를 때
멀리서 새로 동 트는 무명의 시간
두어라, 무념무상의
겨울 배추 맛.
피아니스트, 이 희아
일어나기 싫은 아침
쏟아지는 새소리 사이
작고 고운 발자국
아장아장 나를 밟는다. 너는?
쇼팽의 즉흥환상곡.
만져 보니
장마철의 아침 공기
식빵 냄새 내며 구워져 있다.
눈앞에 아른 아른거리는
감꽃 목걸이.
스무 살의 네 살 박이, 이 희아.
석 자 키로
음계의 가로수 길 누비고 있다.
날개는? 없는데
작은 새가슴 젖어
홰나무 가지 흰배지빠귀 소리
날라 오는 들꽃 향
소리의 곡각지점 여기저기서
샘이 솟는다.
손가락 좌우 두 개씩.
그의 연주는
손가락 열 개 가진 자의 행복.
6척 키의 암흑에게 주는 유리잔.
피아니스트, 이 희아.
상처 깊은 자의 거룩함이여.
사람의 끝에 이르면
한없이 연약한 이도
사람의 시작에 이르게 되고
사람답지 않게 조금씩
날기도 하는가 보다,
이승에서 미리 별이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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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처
신진, 『귀가』, 신생, 2005.8
장롱 속 외투
장롱을 연다,
서늘한 적막-
푸줏간 냉장실에서 고기 챙기듯
가격파괴점에서 온 울 코트
팔목에 건다.
신기한 일이다.
옷과 몸이 만나면
일시에 추위를 몰아내는 온기가 발생한다.
저 어둡고 추운 장롱 안
어디서 이런 열이 모였을까.
추운 날 추위 안에서
어둔 날 어둠 안에서
혼자 떨던 낟알의 볕들이 모여
고맙구나, 언 몸을 녹여주는구나.
여기
저기
지금은 차고 어두운 가슴들의 구석자리에
버려져 있는 그리움.
꺼낼 때면 언제라도 언 마음 녹여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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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처
신진, 『녹색엽서』, 시문학사, 2002.10
사람들은 세상을 어둡게 본다
사람들은 세상을 어둡게 본다. 방안을 거실을 어둡게 보고, 노동을 휴식을 어둡게 보고, 만남과 헤어짐을 어둡게 본다.
그래서 모두들 불을 켜고 산다. 현관에 켜고 거실에 켜고, 만남에 헤어짐에, 잃고 얻음에 불을 켜고 살핀다. 돌을 깨어 돌 속의 어둠을 떨고, 산을 뭉개어 흙 속의 어둠을 떨고, 서로의 가슴에 금을 긋고 속을 살핀다.
구석구석 어둠 찾아 불을 지르는 사람들아, 죽살잇길 죄 풀어서 삼파장 불빛 아래 화안하게 펼쳐 보이는 사람들아, 그대 어둠을 본 적 있는가? 불 없이 어둠을 본 적 있는가? 어둠이 즐거운 어둠, 길이 없어도 왕래하고, 자 없이 저울 없이도 나누는 어둠, 흙과 흙을 잇고 바위와 바위를 받치며 그대 불빛의 빛을 빛이게 하는 어둠, 더 낮은 어둠을 찾아 오늘도 어둠을 긁는, 그대 어둠을 만나 보았는가?
사람들은 세상을 어둡게 본다. 한사코 불을 켠다. 어둠은 세상을 밝게 보고 있는데.
겨울에는 옷을 벗는다
나무는 겨울에
옷을 벗는다.
어린 싹이 덮으라고
옷을 벗는다.
땅은 겨울에
옷을 벗는다.
흙더러 덮고 견디라고
옷을 벗는다.
사람은 겨울에
옷을 벗는다.
사랑이여, 추운 네가 덮으라고
서로 옷을 벗는다.
사자봉 가는 겨울 길
여름의 아이새도우
가을의 루주도 잊은
사자봉 가는 능동산 능선
능구렁이 허물 하나 재를 넘는다.
양모의 외투를 걸친
억새의 바다 지퍼 틈으로 내민
탄탄한 살을 밟으며 작은 배를 젓는다.
눈(雪)빛에 익은 붉은 살의 탄성
왼발 닿기 미안해서 다시 오른발
지팡이 마짐 상처 될라
지팡이 버리고 간다.
일백오십만 평 억새 평원 사자평
씨안개 모래 흩듯 흩뿌리면서
침묵으로 사물놀이 하는 억새의 바다
악보 없이 징치고 장고 치는
참꽃나무, 싸리나무의 혼령들.
산은 산이다
소리치니
산은 물이요
대답하고
물은 물이요 하니
물은 산이요 한다.
사자봉은 갈기만 살랑 살랑
그의 콧잔등에 배를 부리면
산은 산이 아닌 얼치기 시인 수준에
산은 역시 바다요
물은 역시 산이로다.
겨울 산 껍데기
겨울 산 오르는 동안
호주머니 속 땅콩 캐러멜
껍데기만 남는다.
감귤 향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다.
수통에 찼던 물
껍데기만 남는다.
기슭에서 떠돌던
형형색색의 이름들
껍데기 되어 날아간다.
돌아가는 길
나도 껍데기만 남아 있다.
겨울산 골짜기 온통 껍데기
바람의 껍데기가 딱 딱 딱
빈 눈꺼풀을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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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처
신진, 『멀리뛰기』, 민음사, 1986,8
흔적만 남기는 그대
어둠 속에 날린 연처럼
참으로 오랫동안 그대 아름답구나
강물에 던진 돌처럼
네 목소리 가라앉듯 가라앉듯 떠 오르고
비듣는 소리에
조개껍질 냄새로 그대 숨결 피어 오르네
잠 못 드는 시간이면
그대
쏟아지는 땡볕이었네
어둠 속에서 살을 찢는 싯퍼런 칼이었네
공원에서 거리에서 버스 안에서
손바닥 붉게 젖도록 손뼉을 쳐도
내 손바닥 사이에 맞지는 않고
두 눈 감아도 눈꺼풀 사이에 갇히진 않는
그대
밤마다 문고리 잡고
흔적만 남기는 그대
어둠 속에 날린 연처럼
참으로 오랫동안 아름답구나.
겨울 과수원
겨울 과수원에 가 보면 겨울 과수는 왜 빨간 속살 째 겨울 벌에 팔 벌리고 서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자비의 성자를 거두었던 보리수나무나 박애의 한 분이 못 박혔던 십자가보다 성실하고 분명하게, 뼈 속까지 할퀴는 들바람에 몸 부딪는 과수들의 속뜻을 생각하게 되고,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말씀을 움쥐었던 분의 단단한 피 흘림도 목격하게 된다.
돌보지 않아도 휘추리 끝까지 제대로 자라 새벽빛 흔들어 대는 겨울 과수원에서 눈 뜨는 한때. 사람 키우는 동네의 법(法)이란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허황된 계교인지 손이 저리고, 제 새끼들 목구멍이 넘도록 부어 주는 <쉬지 않고 살 되기>란 얼마나 미혹하고 땅 망치는 농사법인지 으스스 몸이 떨린다.
역사에 적힌 나무나 사철 편한 분재목이란 얼마나 비좁고 불편한 대접이며 또 불공평한 영화이랴? 온통 추위에 달아 빨갛게 피 젖은 채 겨울을 나는 과수들이 온 길에 어둡고 갈 길에 비록 낯설다 할지라도 아예 길 없이 살고 공평히 자리를 잡는 모습은 속이 빈 자에게까지 사는 이유를 단단히 문신 뜨시는 일이 아니던가?
겨울 까치
들마을 한 겨울 동구 앞 제방 위에 칼바람 깨며 맨몸으로 선 버드나무 한 그루.
그림자 흩어져 다 털린 논바닥 언 냇강에 자갈 되어 딱딱딱 이를 떨고 그 가슴께 까치둥지 한 소쿠리 위태롭게 얹혀 있다.
삼동(三冬)에도 남은 여름 볕 바람 재우는 양지 버리고 칠월(七月)의 잎 사철 드리운 상록의 숲 버리고
하필이면 삭풍 맞으며 가리고 울 이파리 하나 남지 않은 겨울 나목(裸木) 위에 까치 한 마리 둥지를 틀었는지
밤새 삭은 이(齒) 물어다 빨간 목젖에 덥히는 그 형벌이 달다
맨몸으로 칼을 마고 그 피로 달궈 내놓는 새 이빨, 희고 여문 이빨을 보아라.
겨울 제방 위 버드나무 여윈 가지에 까치 한 마리 불을 씹으며 스스로 옥살이한다.
밤기차
마지막 밤기차
그대 있어서
혼자 앉아도 외롭지 않다.
처음 본 젊은이의 허리를 안고
잠든 노안(老顔)이 흉하지 않고
술 나누는 중년의 음담패설도 야하지 않다.
여자의 어깨에 기댄 남자
남자의 팔을 베고 잠든 여자가 천하지 않다
서울서 부산까지
차창에 가득한 어둠
그대 가까운 오늘은 자신이 선다
흐르는 은하수 물무늬마다 밴 얼굴
잠든 얼굴에서 음담패설에서
밤기차의 흔들리는 속도에서도 보이는 얼굴
앞자리의 청년아
너도 아침이 오는 걸 보려고 잠자지 않았느냐?
그렇구나, 네 어깨 너머
어둠이 겁을 내기 시작하고 \
내가 기다리던 풍경들
―산이 제 모습을 뽑아내기 시작하고
들이 배를 드러내며 기지개 켜고
보아라, 인가(人家)가 가까이 서로 가까이 모엳네
초하(初夏)의 산등성이나 주황쉐터의 들보다
이제 보니 청년아, 네가 아름다운 옷을 입었구나.
사람들 깨어나고
지칠 줄 모르는 욕찌기
서로의 새벽 담배에 서로 눈주름 짓다가
우리 모른 채 헤어지리라
그러나, 그대여 그대 있어서
이것이 우리 서로 알고 지내는 모양인 것을
헤어짐이 아님을 알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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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처
신진, 『장난감 마을의 연가』, 태화출판사,1981.9
겨울 송충이
겨울밤
아이스크림
아들 두 놈이 잠을 잔다.
은백색 망아지
잔등에서 부숴 지는
십구공탄의 금 비늘
분노의 그림자
달게 녹는다.
천막집 소주와
닭 내장 구이의 잔해를 떨며
아비는 옷을 벗는다.
천근만근 누르는
어둠의 큰 엉덩이 밀치며
열세 평 전세 아파트, 밤 내
오므렸다 펴고
오므렸다 펴고
푸릇푸릇 송충이 애벌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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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처
신진, 『목저 있는 풍경』, 아성출판사,1978.3
겨울
-목적있는 풍경
손이 크고 발이 큰
마른 소녀가
헛두레박질을 한다
길어도 길어도
어두운 바람만 한두레박
굿것들을 데불고 딸려 오는데
소녀의 크고 마른 맨발 옆자리 어느새
썩은 해골바가지가 쌓이고 있다
하얗게 잘 죽은 뼉다귀가
귀중한 보석처럼 드문드문 쌓이고 있다.
건방진 거지 이야기
그 늙은이를 만나기 전에 우리는 가슴을 앓아야 한다.
건방진 거지는 우리들이 꿀꿀이죽을 사랑하던 시절부터 범냇골 산번지 그 중 꼭대기 이름 없는 바위굴에서 살았다
서양군인들의 쇠고기조림 국물이 화약내에 잘 얼려서 더운 김을 뿜는 꿀꿀이 드럼통 앞에 우리들이 꿀꿀거리며 줄을 서면
건방진 늙은이는 그의 굴을 빠져나와 헛기침을 하며 지나갔고 우리는 늙은이가 우리들 틈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박수를 쳤다
우리들은 자라서 공장에도 나가고 미장이도 하면서 돈을 벌었다
우리들이 돈을 헤며 범냇골 산번지 황톳길 따라 털그럭 털그럭 빈 도시락 소리에 발을 맞춰 돌아오면 늙은 거지는 가슴을 붙들고 기침하면서 별을 헤아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쭈그러진 양철소리를 감추고 그의 하늘을 옆 눈으로 훔쳐보았다
어디에 계십니까?
마음 아픈 일도 더러 참아 본 사람은 늙은 거지의 별 헤는 소리에서 이런 말도 알아들었다.
어디에 계십니까?
그 소리를 알아듣는 우리들은 방문을 잠그고 우리들의 가족이 떨고 선 이 겨울을 욕하며 한 짝씩 산꼭대기로 눈을 돌리고 늙은이의 나들이를 지켜보았다
늙은 거지를 만나기 전에 우리는 가슴을 앓아야 한다.
노인은 우리 마을을 떠났다.
우리는 그가 살던 바위굴을 바라보며 그가 간 곳을 생각했다.
이름 없는 벌거숭이 산 이름 없는 바위굴에서 그는 지치고 할 일 없지만
더 높은 곳으로 갔을 거라고 아래로 내려가진 않았다고 우리들은 서로 믿었다
어둠이 걷히지 않는 밤이나 가뭄이 계속되는 날 밤이면
우리는 횃불을 들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더 높은 산을 향해 그를 불렀다.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는 건방진 거지 노인을 불렀다.
어디에 계십니까?
어디선가 쉰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에 계십니까?
어디에 계십니까?
노인은 우리와 함께 정성껏 외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