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의 시 - '선돌 유래', '돌 갈기'
계간 시와 정신 1918. 봄호. 신진의 신작 두 편입니다.
선돌 유래(立石由來) ―석기시대
그대 쓰러진 자리
돌을 세운다
뒤집히고 처박혀도 꼿꼿 서리라
돌 치고 서지 않은 돌 없나니
예 이르자고 꿈 빌어 덮어쓰고
손 잘리고 발 꺾이며 구불어 왔나?
꿈을 짐을 벗으렴
현실이 되어 오래 서렴
먼저들 와 계시네
둥글거나 모나거나 넓적하거나 삐죽하거나
서기는 매 한 가지
전후좌우 원근대소 구도마저 갖추었네
바로 서기는 바로 눕기보다 아늑하지
바로 설 때는 안겨 잠잘 때보다 따뜻하고
바로 서기 꽃밭에 묻혀 지내기보다 향그럽지
대지(大地)의 주름을 펴고
바람을 지키며 짐승의 길이 되리
하늘 목도리 두르고 별빛 모자를 쓰고
하늘 우는 날에도 땅 갈라지는 날에도 꿋꿋하리
사람들 간에는 머지않아 잊히리라, ‘바로’와 ‘서기’
땅 속의 누운 말이 바른 말 되고
지하의 꿈이 지상의 땀으로 둔갑하는 날이 오리라
만날 엎드려 울며 우는 줄 모르고 우는 때 오리라
사랑하는 이 쓰러진 자리
돌을 세운다
잊지 말라고 잃지 말라고
대지의 꼭대기에 돌을 세운다
모두가 사랑하는 이, 그의 도착을 알린다
돌 갈기 -석기시대
사람들이 돌을 갈았네
돌을 갈고 곡식을 갈고
낮이면 해를 갈고 밤이면 어둠 갈았네
사랑이며 그리움이며
돌을 갈아 빚었네
바람을 낳고 별을 낳았네
돌을 쥐지 않은 날은 허공을 쥐고
돌을 쥐지 않은 날은 음모를 쥐리
갈지 않은 돌은 사람을 찔러 상하게 하고
갈지 않은 몸은 사람의 마음을 찌르나니
별도 달도 없는 밤에는
너 나 없이 둥글어 져 밤하늘에 떴네
사람들이 돌을 갈았네
밤도 꿈도 곡식도
이별도 그리움도 돌을 갈아 쓰던 시절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