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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눈 밝은 장님/신진(18.열린아동문학 가을호)

신기루(진) 2018. 9. 19. 09:14

눈 밝은 장님

 

 

여보! 내 헤어로션 못 봤어? 여보?”

아빠가 방문을 열고, 주방에 있는 엄마를 부르는 소리입니다. 아침마다 제일 먼저 나가야 하는 아빠는 무언가를 찾을 때마다 이렇게 엄마부터 불러댑니다. 휴대폰이나 시계를 찾을 때도 있고, 숫제 출근 가방을 찾을 때도 있습니다. 아빠의 목소리는 내 방까지 들려오지만 나는 모른 척, 한 잠 더 자려고 침대 시트에 얼굴을 되묻곤 한답니다.

아빠가 부르는 소리에도 엄마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주방 일에 열중합니다. ‘또 저런다, 좀 있으면 스스로 찾아내겠지하는 속셈인 거지요.

여보! 여보?”

아빠의 언성이 높아지면 현관 옆 삼촌의 방문이 열립니다.

형님, 우선 제 것을 쓰세요. 나중에 어디서 나오겠지요.”

삼촌이 아빠에게, 오늘은 자기 헤어로션을 쓰고 출근부터 하시라는 거네요.

우리 삼촌은 자기 물건을 찾지 못할 때가 없답니다. 아빠가 찾는 물건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자기에게 있을 때면 우선 자기 걸 내어놓곤 합니다.

근데, 놀라지 마세요. 우리 삼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에요. 시각 장애 1. 하지만 자기 물건이 놓인 위치는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어요. 귀도 밝아서 문 여는 소리, 발자국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대번에 구별해낸답니다.

삼촌이 언제부터, 왜 앞을 못 보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세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어릴 때 약을 잘못 먹어 눈병이 났는데 그때 치료를 잘 못해서 그렇다는 정도만 알고 있어요. 우리 집에서 삼촌이 장님이라는 사실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건 서로 꺼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삼촌 방은 언제나 어둡습니다.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우리 가족 중에서 얼굴표정이 제일 밝은 사람은 삼촌이고, 몸동작도 삼촌이 제일 빠르답니다. 삼촌은 스물세 살이 되던 작년에서야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요즘은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 걸어서 삼십 분이 넘어 걸리는 기계공장에 나가 일을 하고 있어요. 기계를 조우고 점검하는 일을 한다는데, 짧은 시간에 하루 몫의 일을 거뜬히 해낸대요. 내가 직접 확인하진 않았지만 우리 삼촌은 그러고도 남을 거라고 나는 믿어요.

나는 삼촌 손에서 자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내겐 아빠 엄마보다 삼촌이 나를 안고 달래주던 기억이 훨씬 더 많이 남아있거든요. 2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삼촌은 누워서 두 팔, 두 다리로 내 몸을 받치고는 천정에 닿을 지경으로 비행기를 태우곤 한답니다.

학교 시험을 잘못 봐서 눈물이 나오려할 때에도 힘차게 손을 잡고 흔들어주며

수고했어, 1등보다 착하고 100점보다 씩씩한 소년이야.”

나를 즐겁게 해주어요. 언제나 나를 최고로 여기는 삼촌, 내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나서서 도와주는 삼촌.

나는 삼촌에게 못하는 말도 없어요. 가끔은 뜬금없는 질문도 하지요.

삼촌, 삼촌 눈앞은 캄캄하지?”

궁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렇게 물은 적도 있어요.

삼촌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대답을 해주었어요.

아니, 캄캄하지 않아. 보지 못해도 그렇게 어둡진 않아.”

그럴 리가? 어둡지가 않아? 뭐가 보여?”

다시 다그쳐 물었어요.

캄캄하겠다 싶지? 근데 글쎄, 그게 아니야. 캄캄하지 않아. 눈 먼 사람 눈앞이 캄캄하다는 건 눈 뜬 사람들끼리 하는 말이야. 소경의 눈앞은 말이야, 희기도 하고 노랗기도 하고 붉었다가 푸르스름하기도 해. 색색가지 빗물이 유리창에 달라붙어 후르륵 후르륵 수채화를 그리는 듯할 때도 있고, 비눗방울 있지? 크고 작은 물방울이 보글보글 떼 지어 날아오를 때도 있어. 내 눈앞엔 시나브로 색색의 물방울이 쪼르르르 쪼르르르 피어오르고 있단다.”

삼촌의 말만으로는 삼촌의 눈앞 세상이 어떤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일반인들보다 삼촌이 더 멋있는 세상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우리 삼촌이 러닝머신을 탈 때는 삼촌에게 자기만의 특별한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삼촌은 러닝머신 타기를 좋아합니다. 삼촌 방 한쪽에는 이태 전에 산 러닝머신이 놓여있는데, 처음엔 손잡이를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 겨우겨우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스스로 버튼을 눌러 스타트하고 속도조절까지 합니다. 손을 놓은 채 달리기까지 한다니까요.

러닝머신 위를 걷는 삼촌의 눈앞에는 언제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듯해요. 견우와 직녀 둘이서 북부칠성 그네를 타고 노는 하늘 공원 얘기를 하는가 하면, 신라 화랑들의 산속 수련 생활을 오페라로 부르기도 해요.

허어, 허어, ! 자알 있었니? 강아지, 강아지들아

처음엔 삼촌의 이런 뜬금없는 말이 우습기도 하고 이상한 생각을 하게도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하면 새 세상 해설을 한다는 걸 알고 덩달아 궁금한 지경이 되었답니다.

강아지? 삼촌, 어떤 강아지야?”

이렇게 맞장구를 치게 되어요. 삼촌의 한쪽 손을 잡은 채 나도 삼촌의 강아지를 보려고 삼촌 옆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게 되는 거예요.

많아, 강아지들. 풀밭에 있어. 얘들아, 여기다, 여기. 이슬을 먹고 살아, 우리 강아지, 강아지 풀꽃이야! 오요요요, 강아지 풀밭이 넓어.”

삼촌의 새 세상은 언제나 가슴이 툭 트이는 느낌을 주고 야릇한 향기마저 솔솔 풍긴답니다.

강아지풀 강아지? 걔들이 뭐래?”

쓰다듬어 달래. 허엇, 허어, , 내 몸에 막 뛰어올라. 하하하. 간지러워. 조 앞엔 얼룩말떼가 오요요요, 구름다리를 건너가고 있어. 말들이 구름다리에서 미끄럼을 타고 있어. 나도 함께 타고 있어, 막 엉켜서 넘어져. 근데, 근데, 재미있어. 이히히히 이히히히, 미끌어지고들 웃고들 있어. 나도 그래.”

삼촌의 런닝머신 위 다른 세상 중계방송은 이런 식으로 이어져요.

숲속에 들어왔어. 길옆에 반달곰 집이 있어. 이봐, 반달이! 꿀을 먹고 있어, 꿀맛이 어때?”

삼촌은 한쪽 팔을 런닝머신 손잡이에 올리고, 남은 한쪽 팔로는 반달곰과 함께 춤을 추는 시늉도 합니다.

아빠와 엄마는 삼촌과 내가 눈 감고 하는 여행을 좋게 보지 않는 듯해요. 삼촌이 런닝머신을 탈 때면, 위험하니까 가까이 가지 마라고도 해요. 하지만 나는 삼촌과 함께 손잡고 달리고 춤추는 놀이를 그만두고 싶지 않아요. 삼촌의 중계방송에 맞장구를 치며 끼어들면, 나도 새로운 세상에 빠져들거든요. 삼촌의 목소리와 동작만으로도 실감이 나요.

그날은 토요일, 여느 날보다 일찍 일어난 날이었어요. 전 잘 저녁에 삼촌과 함께 가까운 전통시장에 가서 하얀 토끼 새끼 두 마리를 사온 날이었어요. 늦게까지 삼촌 방 앞 작은 베란다를 마사 흙으로 채워두었어요. 분재원에 가서 사정사정해갖고 배달해 온 흙이에요. 어서 잠을 자라는 아빠,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뒤처리는 그날 하기로 하고 일단 잠자리에 들었던 거예요.

이제 삼촌과 내가 토끼 궁전을 완성할 차례였어요. 마사 흙을 마저 고르고, 베란다 알루미늄 봉 사이의 빈틈을 초록색 철망으로 메웁니다. 흙으로 구운 조그만 굴뚝과 화분을 이어 붙여서 토끼 굴도 만들었어요. 출입구 문고리엔 작은 종을 매달아 문을 여닫을 때면 땡그르르, 땡그르르, 맑은 종소리가 울리도록 해놓았어요. 한 쪽 구석에 사료 그릇을 놓은 후, 드디어 두 마리 토끼를 풀어놓았고요.

한동안 쭈뼛쭈뼛 낯설어하던 토끼들은 발맘발맘 걷더니 금세 몇 발자국씩 뜀을 뛰어봅니다. 침대 하나 반 크기의 베란다 토끼 왕국 좁긴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꽤 깨끗하고 근사한 토끼 궁전이에요.

삼촌과 나는 왕국의 문을 열고 들어가 토끼들 곁에 이웃사람처럼 가만히 앉아서 애들이 어떻게 하나 보았습니다. 토끼들은 삼촌과 나를 가족으로 인정하는지, 별로 낯설어하지는 않아요. 바로 가까이 다가와 눈치를 보며 입을 오물오물 무슨 말을 붙이느라 애를 쓰는 듯했어요.

녹색초원은 클로버 풀밭이었어요. 풀 대궁마다 하얀 시계 꽃이 매달려 있어요. 네 잎 클로버가 눈에 띄네요. 아니, 가만히 보니 모두가 네 잎 클로버예요. 온통 네 잎 클로버인 녹색 초원에 하얀 토끼들이 뛰어다니고 있어요. 공기받기도 하고 고무줄뛰기도 하며 놀고 있어요. 나비들도 날고 있어요. 여름밤 하늘에서 별들이 쏟아져 내리듯 하얀 토끼들이 사는 녹색 초원 위에 하얀 나비들이 쓸려 다니고 있어요.

나는 시계 꽃을 엮어서 목걸이를 매어주려고 제일 가까이 있는 토끼를 불러 세웠어요.

흰 토끼야, 흰 토끼야, 이리 와봐.”

토끼가 귀를 쫑긋,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나를 부른 거야? 흰 토끼라고?”

그래, 널 부른 거야. 아차, 이 초원엔 모두 흰 토끼인 걸 생각하지 못하고 너를 보고 흰 토끼라고 불렀구나.”

아냐, 그게 아냐, 난 흰 토끼가 아냐. 난 빨간 토끼야. 털만 희다고. 그러니까 여기 있는 토끼들 모두 흰 토끼가 아냐. 털만 흰 거지.”

빨간 토끼? 털이 희면 흰 토끼지 왜 빨간 토끼야? 온 몸이 하얗고 눈만 붉은데 어째서 빨간 토끼라고 하니? 넌 흰 토끼야.”

아냐, 아냐! 아아, 참 그렇지. 인간들은 털 색깔을 보지. 사람들은 겉만 보니 그렇지. 우리 토끼들은 눈을 봐. 눈을 보면 마음속을 알 수 있거든. 우린 눈 색깔에 따라 부른다구. 나는 눈이 붉어서 세상을 핑크빛으로 봐. 그래서 나를 빨간 토끼라 부르는 거야. 나는 붉지 않은 세상은 볼 수 없어. 그러니까 빨간 토끼라 부르는 게 맞지 않겠어?”

옆에 있던 다른 하얀 토끼가 끼어들었어요.

난 파란 토끼야. 눈동자가 푸르지 않니? 다른 토끼들이 그러는데, 나에게 보이는 세상은 파랗게 칠해진 세상이래. 눈이 파랗고 마음속도 푸르지, 그러니 파란 토끼지.”

그때 눈동자가 눈두덩에 파묻혀버린 장님 토끼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어요.

내가 파란 토끼에게 물었어요.

그럼 쟤는 눈동자가 없으니 없는 토끼겠네?”

아니, 없는 토끼는 없어. 없는 토끼가 어디 있어! 우리는 쟤를 없는 토끼라 부르지 않고, 장님 토끼라고 부르지도 않아. 밝은 토끼라고 부르지. 눈이 있는 우리는 세상을 제 눈 색깔에 맞춰 보기만 하는데, 쟤는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것까지 다 볼 수 있잖아? 그래서 밝은 토끼라 부르는 거야, 밝은 토끼!”

이상한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하기야 이상할 것도 없긴 하지요. 사람과 토끼가 다르듯, 사람 세상과 토끼 세상이 다른 것이 뭐 이상할 일이겠어요?

그때였어요. 베란다 토끼왕국의 문이 땡그렁 땡그렁 소리를 내며 바삐 흔들렸어요. 엄마가 나를 찾는 목소리

종찬아, 내 꽃무늬 블라우스 못 보았니?”

눈을 감고 풀밭에서 토끼들과 놀던 중에 갑작스런 종소리와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나는 잠시 정신이 얼떨떨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못 보았어요.’ 하려는 찰나, 삼촌이 머리를 긁적긁적 하면서 먼저 대답했어요.

형수님, 잘은 모르겠어요. 근데, 거실 의자 뒤에 블라우스가 하나 놓여있는 것 같긴 하던데요.”

하기야 엄마는 내 이름만 불렀지, 사실은 삼촌에게 물은 것이었을 거예요.

그래요? 어디 보자-, 어머, 그러네. 여기 있었네! 누가 여기다 던져두었을까? 고마워요, 삼촌. 역시 우리 집에선 삼촌 눈이 제일 밝아!”

엄마는 꽃무늬 블라우스를 찾아들고 기분 좋게 외출준비를 합니다.

나는 또 한 번 얼떨떨했어요. 어느 눈이 밝은 건지, 누가 더 잘 보는 건지.

나는 그날 밝은 눈의 삼촌과 함께 뒷산에 가서, 아카시아 앞이며 클로버 잎을 따다 토끼 궁전에 바쳤습니다. 돌이며 나무 조각을 주워 와서 궁전을 꾸몄습니다. 하루 종일 눈 밝은 삼촌과 토끼들과 함께 놀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