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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 나는 시쓰기6 동일성과 차이성-신진(시문학. 10월호)

신기루(진) 2018. 10. 29. 16:52

차이 나는 시 쓰기 강의 6

동일성에서 차이성으로

신진(시인, 동아대 명예교수)

 

1, 동일성과 차이성

 

시인은 특정 관념의 진술을 위해 적합한 언어를 고른다. 일반의 언어는 매우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개념에 갇혀 통용되기 때문에(langue) 각별한 시적 체험(parole)을 잘 담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미지를 찾는다. 이질적인 두 사물 간의 동일성을 겨냥하여 표현하기도 하고 이미지들의 병렬을 통해 재현하기도 한다. 이질적 관계에 있던 두 사물이나 이미지들, 이것이 주지와 매재이다.

문덕수의 시론에 의하면 비유의 4요소는 주지(본의), 매재(유의), 유사성(인접성 포함), 차이성(상이성)이다. 그리고 유사성은 차이성을 전제로 성립한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촉()불이오

그대 저 문을 닫아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라

- 김동명 내 마음은일부

 

내 마음이 주지요, ‘호수가 매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원래 이 주지와 매재는 엄연히 이질적 존재다. 나와 호수란 완전히 다른 존재다. 하지만 그 차이성 속의 동일성을 유추하여 주체적 정서를 드러내는 데 쓴다. 호수라는 매재에서는 맑음, 성찰, 고요함 등등의 유사성을 찾을 수도 있겠으나, 이 시에서의 내 마음호수사이의 동일성이란 온갖 헌신을 다 바칠 생각으로 항시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정도이다. 나의 마음과 호수와의 본래적 이질성이 비유의 차이성이다. 어찌 인간의 마음이 물리적인 호수일 수 있으랴? 그래서 주지, 매재, 유사성, 차이성 등을 비유의 4요소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접성과 유사성(차이성을 포함하는)은 오랫동안 동일성의 원리를 구현해온 요소이다. 즉 은유와 환유는 주지를 언어적으로 동일화 한다. 그뿐 아니라, 화자와 청자, 시적 대상과 서정적 자아 사이의 동일화를 이루고자 한다. 이는 고대 변론술에서부터 전승되어온 대표적 수사방법으로, 웅변의 현장에서 내용을 보다 세련되게 선동적으로 표현하고자 이용했던 변론 기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더 근원적인 논리를 찾아가면 플라톤의 원본우선주의에 닿을 수 있다. 플라톤에게 예술작품은 언제나 저급한 것이었다. 예술작품이란 원본(이데아 또는 진실)에 가까울수록 그나마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근대 이후의 세계는 동일성 상실의 상황을 고뇌하게 되었고, 그래도 시인이란 동일성의 회복을 실현하는 존재”(김준오, 시론,4, 394)라고 정의되기도 한다. 이때의 동일성은 객관 세계의 상실과 자아상실이라는 위기감을 해소하고 객관 세계와 자아의 회복을 갈망하는 데서 생성되는 성향이다.

그런데 객관과 자아가 부정되고, 주관과 타자, 유목성과 유희성이 신뢰되는 오늘날의 시에서 동일성에 경도된 사고는 미몽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차별적이지 않는 세계는 독자(獨自)의 존재 의의를 갖기 어렵다. 뿐 아니라 언어는 매 순간의 시적 체험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무수히 다양한 위치에 놓임으로써 그 기능성을 최대화 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주관화, 내면화 하는 서정시에서는 원래적으로 동일성 이상 차이성이 중요한 것인데 그동안 실제 중요도에 비해 주목 받지를 못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은의 매재 호수와, 주지인 온갖 헌신을 다 바칠 생각으로 항시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과의 관계도 만만찮은 차이성을 보여주거니와 그대라는 시적 대상과 나 사이에는 동일화 하지 못할 차이성이 내재고 화자와 독자 사이도 마찬가지다. 그 차이로 하여 시적 풍요로움이 더해진다. 동일성과 차이성, 이 둘은 시뿐 아니라 모든 언어활동의 두 축이거니와, 날이 갈수록 차이성의 중요성이 더 부각되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근년의 시 한 편을 들어보자

 

한 벌의 그가 지나간다 그는 늘 지나가는 사람  늘 죄송한 그가 늘 최소한의 그가  목이 없는 한 벌의 양복이 허공에 꼬치 꿰인 듯 케이블카처럼 정확한 구간을 지키듯 신호등을 지나 빵집을 지나 장미연립을 지나 가끔 양복 속의 목을 꺼내    카악- 가래를 뱉기도 하며 한 벌의 양복으로 지나간다 대주 연립 206호 앞에서 양복이 멈췄다 길게 초인종을 눌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양복이 열쇠를 비틀어 철문 한 짝을 떼어내자 철문 속에 안전하게 보관된 가족들이 TV를 켜놓고 웃고 있었다 가족들이 양복을 향해 엉덩이를 조금 떼더니 이내 TV 속으로 빠져들었다   양복이 조용히 구두를 벗었다 한 벌의 그가 양복을 벗었다 모든 것을 걸어두고 나니 그저 그런 늙은 토르소에 지나지 않았다 - 손순미, 한 벌의 양복전문

 

이 시대 가장(家長)의 자동화된 삶과 외로움을 비유적 언어로 차근차근 보여주고 있다. 가장의 삶은 주체적이지 못하고(목이 없이 양복 한 벌만으로 라는 역설) 주눅들어있고(늘 죄송하기만 한 최소한의 그로 존재한다.(낮춘 진술 understatement), 가족들에게조차 외면당하고 있으며 가장의 역할에 자동화 되어 있다.(케이블카, 정확한 구간의 은유, 신호등, 빵집, 장미연립 등의 예시적 환유) 이와 같이, 가장은 최소한의 생명만 부지한 채 집에 도착해서도 외면당한다. 머리나 손발도 없이 몸통만으로 존재하는 토르소(은유)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은 한 벌도 아닌 양복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가 된다. 주체적 사고와 창의적 본성을 잃고 하릴없이 남은 늙은 물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양복이 열쇠를 비틀어 철문 한 짝을 떼어내자/철문 속에 안전하게 보관된 가족들이/TV를 켜놓고 웃고 있었다>라는, 역설과 아이러니로 엉킨 대목은 만성적인 소외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매재들과 주지를 성급히 동일화, 일반화하기보다 매재들의 차이성을 밀고 가서 더욱 차이 나는 정황으로 시적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시적 대상()와의 동일성은 포기되고 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구분할 만큼은 구분할 수 있지만, 은유와 환유는 결국 동일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닮은 것이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개념 지향적이라는 점, 우연적이지 않고 결합적이라는 점, 관습화되어 거의 자동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도 둘은 공통적이다.

하지만 차이성이 중요하다는 자각이야말로 제대로 된 비유를 구사할 수 있는 자질이 된다. 비유는 동일성 외 차이성 추구를 통하여 자기 표현성, 유희성, 흡인성을 발휘하는 언어이다. 동일성의 비유론으로는 채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 역설, 낮춘진술, 과장진술, 트릭, 미언(美言法), 곡언법(曲言法), 생략법, 도치법, 예시법 등등 말의 비유’- 수사법상의 변화법, 강조법 들도 저마다 차이 나는 표현을 위한 효과적인 전략들이 된다 할 수 있다. 특수한 정황 제시를 통한 비유적 언어전략이 차이의 비유인 것이다.

언어는 구체적인 삶을 반영한다. 우리의 존재와 삶이 동일성 외에 차별성에 의해서도 존재하듯 모든 텍스트의 생성과 해석에는 동일성의 원리와 함께, 차이성이라는, 차이성에 의해서만이 그 변별력을 갖는다. 시적 언술의 보다 기본적 동인(動因)이 되는 차이성의 원리에 관심을 재고하여야 마땅하다. 일반화 하고자 하는 동일성의 이면에는 차별화 하고자 하는 긴장(tension) 지향성이 있는 것이다.

차이성의 비유는 언어 표현과 실제의 의미 사이에 간극(대조를 포함)을 조장하고, 언어표현을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상태로 방치하는가 하면 개념 파괴나 언어의 우연적 만남과 같은, 차이 자체를 목표로 삼으려 하기도 한다. 이들의 문맥적 불합리와 모순과 상식 부정성은 텍스트 안팎의 상황적 맥락에 의해 이해될 뿐이다. 비유적 원리를 갖되, 비유되는 두 사물 간의 차이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상황적 맥락에 의한 의미화의 가능성만을 열어두는 언술 전략인 것이다.

M. 블랙은 고대로부터 비유에 대한 관점을 정리하여, 대치론(代置論), 비교론, 상호작용론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하였거니와 유사성(은유)과 인접성(환유)이 대치론에 의하거나 상호작용론에 이르는 동일성 지향의 표현이라면 상호작용론에서 유희론(또는 해체론)에 이르는 과정에는 차이성이 중심이 된다.

종잡을 수 없는 우연의 시대, 경쟁과 불신의 시대, 핵가족화에서 나아가 1인 가족이 넘쳐나는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모방 재현의 본능보다는 쾌락적 본능, 유희적 본능, 자기표현의 본능이 맹렬해지고, 차이의 비유는 불가피 세력을 얻을 수밖에 없다 할 것이다.

 

철조망가시를 감고 넝쿨장미가 꽃을 피웠다

저 꽃, 철조망가시가 뿌리다.

장미꽃이 향기를 독가스처럼 뿜어내는 5월의 한낮,

햇살 한 줄기, 철조망가시에 걸려 있다

철조망가시가 햇살 속으로 깊숙이 들이민다

햇살이 뿌리 깊은 꽃을 피우고 있다.

당신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디서 전화하는 거야? 어딘지 모르겠어, 안도 없고 밖이 없는 곳,

처음도 끝도 없는 곳,

구름이 모여 허공 속으로 수많은 가시를 퍼뜨리고 있는 곳

무지갯빛 가시에서 무지개가 솟기도 하는 곳,

날아오르는 새 떼들도 여지없이 가시가 되어

허공 속으로 박히고 있어.

누구랑 있어? 혼자야.

복사된 무수한 혼자.

얼마 후 구름 속으로 들어갈 거야

그리고 수많은 가시로 분해되어

마침내 허공 속으로 뿌리 내릴 거야.

당신 말의 가시가 내 가슴 깊숙한 곳에 뿌리로 내린다.

내 몸에서 하루 종일 꽃이 피어난다.

무수하게 복사된다.

바람처럼 피어난다.

구름처럼 뭉쳤다 흩어지고 뭉쳤다 흩어진다.

저 꽃, 외로움의 가시가 뿌리다.

- 구석본, 혼자, 꽃을 보다전문

 

일반 언어의 개념과 질서를 넘어서는 맥락이다. 전통적 의미에서 비유라 부를 만한 구절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철조망 가시가 장미의 뿌리라거나 그 장미꽃 향기가 독가스라거나, ‘말의 가시정도의 은유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예사롭지 않게 큰 차이성에 바탕한 비유들이 쓰이고 있다.

화자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없을 수 없다. 상호 침해가 불가피한 세태를 사는(철조망, 넝쿨), 도시인의 고독과 허무의 절규라 할 만하다. ‘철조망 가시를 뿌리로 하는 장미꽃의 독가스이 지수(指數) 이미지는 따뜻한 정, 자연 생명력이 고갈된 까칠한 현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장미, 가시, 뿌리, 복사되는 꽃, 외로움의 가시로서의 뿌리 등등 매재들의 낯선 위치는 동일성에 비해 한층 강화된 차이성에 의한 것들이다.

당신은 아내인 듯하지만, 업무 중에 전화를 받으면서도 외로움에 젖어있는 화자는 가시에 둘러싸여 가시를 무수히 퍼뜨리기나 할 뿐이다. 음모와 탐욕이 왕성하게 잠식하고 있는 사회, 인간은 결국 외로움을 양식처럼 먹고 살 수밖에 없는 허무의 존재라는 말일까? 장미 가시와 철조망 가시와 삶의 가시, 그리고 복사되는 가시와 외로움의 가시, 이런 가시 이미지의 연쇄는 도시의 삭막함과 불안감과 고립감을 증폭시킨다. 전화 통화 형식을 빈 다중 음성조차 운명처럼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혼란한 사회의 각박함과 고립감,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업무들 사이의 건조함을 표현하고 있다 할 것이다.

주지와 매재 사이의 간극이 크고 낯설게 느껴질 때 시적 긴장감은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지만, 그 만큼 대중성 확보는 힘들게 되고 동일화는 힘들게 될 수도 있다. 현대시가 감수하는 일이기도 하다.

 

2. 차이성을 향하여

 

참신한 상상력으로 보다 효과적인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은 어디에서 갖추어질까?

참견을 붙여보자면 유아론적(唯我論的) 사고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하고 싶다. 자신은 자신의 경험을 넘어 존재할 수 없다든지, 자신이 아닌 시공에 나란 존재가 있어서도 안 된다는 페쇄적 자아관에서 탈피하여 시적 주체의 품을 넓혀야 한다. 사물과 현상, 낱낱의 이미지를 생산적으로 축적해야 한다. 자기밖에 모르는 자아는 자기중심의 객관 세계만을 고집하게 된다. 따라서 차이 나는 타자를 향한 진정성에 이를 수 없고 추상적인 동일성 주변만 맴돌게 된다. 나를 열고 타자를 존중하고 다가감으로써 차이를 발견하고 자아의 새로운 확장, 자아의 깊이와 너비를 이루게 된다. 자신이 지금까지 특정 격식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상을 반성적으로,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볼 때 긴장의 이미지들을 쌓게 된다.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창의의 자유는 그 순간 획득된다.

 

천하의 이치는 끝마치는 동시에 다시 시작됨으로써 항상 다함이 없다. 다함이 없는 항()은 일정함을 말하지 않는다. 고정되어 있는 것은 항이 될 수 없다. 오직 때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바뀌는 것이야말로 상도(常道)이다.

근사록(近思錄), 도체설(導體說), 十三.

 

변함없는 한결같음이란 동일하게 고정됨이 아니다. 시시때때 변하고 바뀌는 것이 상도이다. 변화하는 항()이란 끝없는 차이성과 동일성 속에 있다 할 것이다.

갖가지 동일성으로 동여매고 있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중(言衆)이 공유하는 언어도 차이성을 바탕으로 동일화 한다. 소쉬르가 분석한 언어의 체계도 보편적 동일성에 입각한 랑그(langue), 개개의 발화 행위 즉, 언어와 언어를 구별하게 하는 파롤(parole)로 구분하여

시인은 매순간 내면의 갈등과 선택에 귀 기울이며 세계와 내면의 열망을 들어야 한다. 개인이나 국가의 정의, 경쟁의 논리나 허무의 논리도 완전무결하지 않고 한결같지 않다. 그들은 부단한 변화에 놓여있고 변화는 차이를 낳는다. 한결같음은 차이들뿐이다. 시인은 변화의 맥락을 따라 나아가고 되돌아보며 맥 짚기를 계속한다. 세계의 자아화, 주체와의 동일화란 그러나, 변화하는 차이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차이는 자유의 표현이고 자유는 차이의 인식에서 증거된다. 모든 조작된 상징들, 격식과 규제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지금에서 다른, 세상의 타자들을 향해 다가가야 한다. 문법, 철자법에서마저 자유로워진다.

오늘날의 인간은 깊은 갈등 속을 헤매고 있다. 개인과 사회 사이,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이, 경쟁과 회피, 참여와 허무 사이에서 방황한다. 동일성 상실을 근본 원인으로 들기도 한다. 과연 불성실한 허무주의와 주체 상실의 잉여감이 동일성 상실 때문일까? 주체상실을 내세우고 허무의 물밑에 숨는 행위가 재현되고 답습된 까닭은 아닐까? 상실한 것은 동일성 뿐 아니라 진정한 차이성이기도 하다. 차이성의 회복은 인간 본연의 동일성을 회복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차이성에 의해 모든 인식은 구분지어 진다. 인간 사회도 그렇거니와 자연 생태의 사회는 원래적으로 동일성과 함께 차이성에 의해 유기적 생명을 얻는다. 동일성 회복을 주장하는 이가 많기는 하나, 동일성 상실의 위기는 동일성 회복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성의 포용 내지 차이성과의 동행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세계와 자아에 대한 대립과 적응과 융합- 서정적 자아의 태도는 차이성과 동일성의 오묘한 이중주(二重奏)에서 형성된다.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 박남수,전문

 

1959신태양에 발표된 이 시는 비정(非情)한 현대 문명의 이기심을 풍자한다. 한없이 추앙받던 문명이라거나 지식이라거나 하는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들인지, 폭로하고 있다.

새를 포획하는 폭력의 즐거움은 새의 입장에서 보면, 한낱 상한 육신을 내어준 일일 뿐이다. 화자는 새의 죽음을 통해 에코토피아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체의 번거로운 논리가 없이 서로 체온을 나누어 가지는 새는 문명이나 폭력으로 오염시키거나 가로챌 수도 없는 차별된 순수이며 진실이다. 새를 통한 절대의 가치가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통해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문명의 초창기에 인간은 자연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연을 숭배하거나 모방하면서 동화되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근대의 합리주의적 책략으로 대체된다.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고 개발하는 대상으로 지배하고자 한 것이다. 그 죄업으로 하여 이제 자연으로부터 소외되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이기적 탐욕의 전장이 되고 말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내면의 자연을 회복하여 외적 자연과 화해함으로써 주체와 자연의 화해가 가능한 현대적 주체의 능동성을 찾기를 역설한다. 되새길 만한 화두다.

나 중심 또는 공동체 중심의 의도를 공유하기 위해 급급해서는 안 된다. 존재와 진리는 결코 멈추지도 않고 규정될 수도 없다. 적격을 넘어서는 타자의 발견과 수용에서 언어예술의 진면모가 드러난다. 현실 밖의 전혀 엉뚱한 데서 시가 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자아집단적 개인적 무의식이며 개인생활과 사회적 경험 그리고 만상에 가득한 물리적 정신적 타자들의 총체로서의 시적 자아에서 온다는 말이다. 그것은 동일성과 차이성을 양대 축으로 하는, 갈등과 선택과 지양의 풍요이며 공동주체의 시공이다.

차이성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우주에서만 존재한다. 인간 외의 동식물은 동일성의 눈으로만 세계를 맞는다. 지식을 쌓되 지식을 버리고 질서를 찾되 질서에서 해방될 때 차이성의 언어가 발견된다. 모든 선입견을 벗어던지고 대상을 통해 스며드는 감정, 마주친 현상과 공동 주체에 이르는 사랑과 연민, 그 순간의 감정, 바로 그 현상의 실재가 되어 몸과 마음을 던지는 순간, 탄생하는 것이 시가 아닌가 한다.

창조행위는 자신의 진실이 오로지 창의적 도전임을 각성하는 자의 몫이다. 도전은 의식과 의도의 한계를 넘어서는 깊이와 너비에서 이루어진다. 이상 자아를 향한 무수한 도전은 무수한 타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시시각각 새로운 탈태(脫胎)를 거듭한다. 이를 수용하며 표현하는 힘은 무엇보다 시인의 개방 윤리, 열린 정신에 있을 터이다. 차이의 비유는 단순히 현전의 형이상학을 무력화하고 의미를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함과 현전(現前)함 사이의 역동적 긴장을 회복함으로써 매순간 진실과 진리에 다가서는 자의 용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