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의 시집 평/류명선/월간 시문학 19.6월
<서평>
참 시인의 완숙한 목소리
- 신진 시집 『석기시대』(시문학)
류 명 선 (시인)
참으로 오랜만에 시집 같은 시집을 만났다. 신진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인 『석기시대』가 그것이다. 시력 40여년이 훨씬 넘은 그의 시는 이제 원로시인으로서 완숙에 이르고 있었다.
신진 시인과 나하고의 만남은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니까 1969년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신진 시인은 동아대학교 학보사에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 학보사에서 주최한 <전국 고등학생 시화전 대회>에 나도 출품하면서 말로만 듣던 신진 시인을 만났다.
그는 부산시내 고등학생 중 전국단위 문학 공모에서 입상자와 각 고등학교 문예반장이 주축이 된 <전원문학회>을 창립, 동문회의 초대 회장으로서 이미 우리 문학청년들에게 이름이 나 있었다. 문인을 꿈꾸었던 문학도들의 맏형으로서 그 당시 ‘신진’이라는 이름을 모르면 문학도가 아니라고 할까.
<전원문학회>가 주최한 학예제, 시 낭송회, 시화전 등은 기성문단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회원 중에 과반수이상이 전국문예공모에 입상할 정도였으니 그 성과는 대단했다.
이런 <전원문학회>의 선배로서, 지도교사로서 27년 동안 이끌어 온 그의 지도력은 시인이 되어서도 그대로 보여주었다.
신진 시인은 대학시절에 언제나 불의에 맞서서 패기가 넘친 학생으로서 교련반대, 학원공원화 반대 등의 학내 문제뿐만 아니라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유신 음모 분쇄에 데모 주동자가 되어 저항하다가 결국 체포되어, 경향의 매스컴 등에 보도되자, 그 때문에 연기 중이었던 군대 영장을 받기도 했던 반골의 대학생이었다.
신진 시인의 문학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한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인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오면서 진정한 시인이 되고자 했던 그의 결실이 지금 이 시집을 상재하는데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 평생을 시와 동행하며 살아 온 정통시인의 참 모습을 이 시집에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 시집의 표제 제목인 석기시대란 말 그대로 그는 인간의 자유로움과 자연과의 공유를 통해 함께 살아가는 참다운 사람의 본성을 찾고자 노래하고 있다.
수목이 사람 모양을 하고
물과 바람과 볕으로 사는 내력
사람이 수목이 되어
바람 일구고 물 나누고 볕 갈라 쓰며 사는 내력
시나브로 새들이 물어 와서
바위마다 빗금으로 새겨 놓은 글
- 시 <읽고 싶은 글> 전문
이 시는 살아있는 나무가, 살아있는 사람과 함께 어깨동무하며 물과 바람과 볕을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새들 또한 이러한 면을 깊이 인식하고 새들이 바위마다 기록해 놓은 알 수 없는 그 글귀가 과연 무엇인가를 사람이라면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에 인간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운명적 공동체이기에 자연과의 땔 수 없는 필연적인 사실 앞에 사람들에 의한 자연 환경 파괴는 매우 위험하다는 것임을 그는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돌을 보면
쥐고 싶다
불끈, 이 돌을 처음 움켜쥐었던 생명체
낯익은 유인원의 체온
내가 쥐면 바로 앞에서
꽈악 마주 잡고 웃는 털보의 순진한 눈매
돌
바람이 쓰다듬고 별빛이 핥으며
오랜 세월 식혀왔나니
여기, 단단한 심장, 너덜로 깔려있네
(중략)
-시 <돌도끼 휘두르며> 일부
흔히들 사람들은 돌을 보면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 그냥 돌이라고 지나친다. 그러나 이 시인은 돌도 역시 하나의 생명체임을 강조한다. 이 세상에 죽어 있는 사물은 아무 것도 없다. 돌도 그 역사가 깃들인 하나의 생명체이기에 돌을 쥐면 체온을 느끼고 그 돌의 모양을 보면 태고적 낯익은 얼굴로 떠오른다. 그래서 이 시인의 돌에 대한 상상력과 관찰력, 그리고 직감력은 대단하다.
그저 순진하기만 했던 수만 년 석기시대에 살았던 사람이, 죽어서 바람이 쓰다듬고 별들이 핥으며 단단한 심장이 하나의 돌로 변한 어느 유인원의 따뜻한 눈매를 보며, 태고적 그저 순수했던 모습을 동경하며 그는 너무나 반갑게 맞이한다.
이런 시적 발상은 이 시인이 원래 가지고 있던 착한 심성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지금 현대 문명사회에서 인간성이 자꾸만 피폐해 가기만 하는 이 사회를 한탄하며 이 시인도 역시 별의별 사람들 속에 상당한 상처와 피해를 받고 아주 질겁하고 있다.
신진 시인의 자연숭배 사상은 그의 시편 속에 여가 없이 드러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시 <맨 처음>을 보면 확연하게 그 상태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자연을 통한 원초적인 인간의 참된 모습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는 변함없이 이 시인의 시인적 기질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세상에서 맨 처음
공중에다 돌을 던진 사람은
새가 되어 공중에 들고
세상에서 맨 처음
물에 대고 돌을 던진 사람은
물고기가 되어 물에 들고
세상에서 맨 처음
사람에게 돌을 던진 사람은
사랑이 되어 그의 가슴에 들었네
이 시에서 그의 자연에 대한 신뢰와 인간이 함께하는 세상, 그 세상은 세상을 주창한 조물주일까라는 의문의 물음표에는 답하고는 있지만 시인은 과연 타고난 대로 그 옛날에 ‘선지자’였다는 사실 앞에는 무척 주저하고 있다. 시인은 성경에서는 ‘선지자’라고 명명하고 있다. 선지자란 미래의 상황을 미리 내다보며 예단하는 자가 시인이라는 이름이다.
그래서 ‘시인’이라는 이름 앞에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어느 누가 시인을 존경하는가. 그래서 시인은 시대에 따라 권력을 가진 위정자들에게 항거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신진 시인은 대학교수 시절에도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의 일선에 서서 1987년 4.13호헌조치에 서명하였고 각종 시국선언을 일삼아 온 시인이었고 학자였다. 그 또한 시국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가 전면적으로 앞장서지 못한 것에 항상 미안해하고 있지만 그 시대의 시국 상황을 이해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 그의 그만한 행동도 대단했다고 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을 등지고 석기시대로 회귀하고 싶은 신진 시인의 시를 통한 절규도 이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 시집에 수록된 석기시대를 소재로 한 <허공> <선돌 유래> <다리 둘로 걸었다> <돌의 말> <마제석기> <장승 깎기 체험기> 등의 시편들도 참으로 귀중한 시편들임을 느낀다.
신진 시인은 어느 듯 황혼의 나이인 70줄에 들어 원로시인이란 칭호를 듣는다. 나이가 많아 원로가 아니고 한국시단에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한 명의 ‘원로시인’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며 그의 시들도 허무를 찾아가는 모습이 발견된다. 숱한 세월을 떠나보내고 살아왔던 길을 바라보면 참으로 아득하고 멀기만 하다. 식솔들은 제 살길 찾아 다 떠나고 혼자만 우두커니 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눈가에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바로 그 허무함을 증명해 주고 있다.
지금 보니 걸어온 길
긴가민가하네
바로 엊그제
가지 않은 길조차 빤히 보았는데
- 시 <그 때> 전문
혼자란 남에게로 가는 시간
혼자 앉아 있어도
몸속까지 남의 숨결이 파고드네
숲길 따라 홀로 걸으면
누군가 저만치 앞질러 가며
볕살 바람살 써레질 하는 소리
혼자란 버려지는 시간
황야에 버려져있어도
물내 가까이 흐르고 있다네
혼자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시간
혼자가 아니므로 혼자 볕을 쪼이고
혼자가 아니므로 혼자 울먹거리네
혼자란 혼자를 벗는 시간
혼자를 삭여 여럿이 되는 시간
- 시 <발효의 시간> 전문
이 두 편의 시에서 굳이 무엇을 말하지 않아도 이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늙는다는 것, 이건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이치다. 이 세상에 태어나 안 죽는 사람 없듯이 나이가 들면 늙어가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한평생을 사는 동안 잘 살아왔던 못 살아왔던 간에 혼자가 되는 순간 약해지는 게 인간이 아닐까. 특히 신진 시인은 자존심이 강하기로 이름이 나있다.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선배시인들에게나 그 어떤 사람에게도 자기의 할 말은 다 하는 시인이다. 그만큼 모든 면에 있어서 자신감이 넘칠 정도로 올곧은 시인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시 <발효의 시간>에서 보듯이 그는 이제 혼자라는 사실 앞에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추스르며 혼자라는 외로움을 스스로 위로하며 승화시키는 시에 도달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 시인에게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시 <시 쓰기 때려치우고>가 그것인데, 씨 쓰기 때려치우는 이유가 그는 이미 ‘시의 경지’에 도달해 보면 시도 이 세상의 인간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게 지금 그의 심정인데 ‘평생 시를 쓰고 살아보니 시도 아무것도 아니고 결국에는 인생이란 허무하다’가 감추어져 있는 그의 속마음이 아니겠는가.
시 쓰기 그만 둘 때가 되었다
마음 더운 한 때 치고 빠지는 삥땅치기
인형 뽑기 꼼수 따위
핏대 올려봤자 구석 세상마저 닿지 못하였고
맑은 말 진득이 담지 못하였거니
길게 공갈치고 엄살 부릴 일이 아니다
때려치울 때 되었다
시원찮은 몸뚱어리 그만 구르자고 눈치 보는 때
눈두덩이며 콧등이며 덤덤한 때 이르렀나니
시 너머 닿은 경지 가까운 티 아니겠는가?
(중 략)
-시 <시 쓰기 때려치우고> 일부
신진 시인은 시 쓰기 때려치우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진술하고 있는데 이 시가 갖는 중요성이 있기에 살펴보자면 이렇다.
그는 험한 굴곡의 세월을 살면서 온갖 세상의 궂은 비 사이를 피해 다니며 시를 쓰며 살피었으나 종교인은 인간들에게 사랑이란 말뿐이고, 인정이 메마른 세상에 내 한 몸 누 울 곳 없고 정의의 꽃이라는 상아탑에 가서 정의를 찾아보았지만 정의는 온간 데 없었다.
이름 있는 문인이란 게 항상 말재주로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말장난으로 핏대 세우고, 위정자는 항상 자유라는 이름으로 거짓된 가면을 쓰고 질러가나 돌아가나 결론은 매 한 가지였다. 시가 이 세상에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걸 이제 사 깨달았는데 시 안 쓰고 살면 나는 얼마나 편안한줄 모른다.
이런 요지로 쓴 그의 시는 지금, 이 시대의 현실을 잘 파헤쳐 주고 있으며 또한 이 땅의 시인들에도 경종을 울리고 있음을 본다.
신진 시인은 그의 문학적 원천을 찾는다면 그는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동래고등학교 때 받았던 민족주의 교육에 당대의 사실주의 소설가 요산 김정한과 서정시인 청마 유치환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두 분 모두 신진 시인의 고교 선배이시다. 그리고 대학시절에 맞은 교수 조향, 구연식 시인 등의 초현실주의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심취했던 휴머니즘, 실존주의, 불교와 노장사상, 분석심리학, 세계의 신화 등에서도 작동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위해 공부한 것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81년 만 30세로 나이로 동아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모교이기도 한 이 대학에 문예창작과, 대학원에서 시론, 시 창작론, 문예비평론 등을 후배들인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을 숱하게 배출했다. 그는 36년 동안 봉직한 이 대학을 만 65세 나이로 퇴직했다. 정이들대로 든 이 대학을 떠나야 했던 그의 심경이 어떠했는지 정년을 앞두고 쓴 이 시가 너무나 진솔해서 심금을 울린다.
의자를 밀어놓고 서니
심심합니다
창밖을 바라보며 기지개켜니
심심합니다
14층 연구실 창 밖
산 빛 가을입니다
“가을입니다”
소리 지른 후에 심심합니다
만나지 못한 얼굴
없습니다
없습니다, 듣고 싶은 목소리
친구도 형제도 사제 간의 미련도
없습니다, 심심합니다
손바닥 위에 식구의 얼굴 올립니다
“이봐! 이봐!”
공기 굴려보아도 심심합니다
눈빛도 마음도
울지 않고 웃지 않습니다
의자 당겨 다시 앉습니다
심심합니다, 속이 뻔히 보입니다
- 시< 심심합니다> 전문
나이가 들면 온몸에 기가 빠져 나가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로만 하고 싶고 그게 늙어가는 모습이다. 열정도 없어지고 순해 가는 얼굴에 그저 어린아이처럼 변해져 간다. 옛일을 생각하면 잘 한 것보다 못한 것이 더 떠오르고 후회가 막심해 온다. 그의 시 <나이 든 봄>을 보자.
나이 먹는다고 그런가
봄이 와도 춥네
끝없이 들이키던 위장, 끓어오르던 가슴
식는가 보네
손 발 따습기로 알아주던 몸인데
다 됐나 보네
옷을 더 껴입어도 손발이 차고
이마가 차고 입술이 차네
춥지 않아도 떨리네
나이 먹느라고
속에 품은 것 더디 식으라고
속에 불 때느라 그런가 보이
덥혀도 덥혀도 식는 종자들 익히느라
주름지고 거죽 처지고
불 곁에 앉아도 몸이 떨리는가 보이
(중략)
- 시 <나이 든 봄> 일부
이 시에서 따뜻한 희망을 가져다주는 봄도 나이가 들면 봄도 봄 같지 않아 보인다. 신진 시인의 시적 묘사력이 확연하게 돋보이는 시이다. 늙은이가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중얼거리며 푸념하는 풍경이 눈에 선해 온다.
그러면서 풍자적으로 “이름도 성도 모르는 씨앗들 쏟아져 나가 그림이 될까? 글자가 될까? 저녁밥이 될까? 동안거 절 방에 드센 웃풍이 될까? 나이 먹으니 날 풀렸다, 봄 왔다 해도 춥네. 씨방 안에 숨죽인 씨들 춥지 말라고 열 보태느라 그런가 보이. 종자 죄 부어놓고 구석 찾아 웅크린 솔방울처럼”
신진 시인은 그가 촌놈이 되기 위해 경남 김해군 가락면으로 이주를 해서 30여년을 낙동강의 주변인 강촌과 산촌에서 살고 있다. 그가 촌놈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듯이 이제 촌놈 투의 목소리로 우리 시에 촌놈들의 언어를 도입시키고 있는데 참으로 그의 시의 시적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런가 보이, ‘보이’라는 친밀감이 나이든 노인네들의 늙어가는 심정이 이 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나는 요번 신진 시인의 『석기시대』 시집에서 참 많은 것을 배우고 알았다. 그가 살아온 세월이 그저 평탄하지는 않았구나. 그리고 신진 시인에 대한 잘 못 알려진 진실도 알게 되었다. 언제나 풍운아처럼 보였던 신진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 <인간풍선>은 숱한 인간 말종들의 표상을 잘 풍자해 놓았다. 그도 역시 시인이었기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사회의 인간 적폐들을 시로 고발하고 싶은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골목 입구에서부터 보였다/ 전자상가 키 삐죽 큰 풍선인간이/
벌떡 일어서다 삽시간에 쭈그렸다 인사를 한다/ 웃을 뻔한
순간 울 뻔하다가 다시 깍꿍/ 좀 더 오래 웃으면 바삐 따라
웃으려다가/ 좀 더 울면 따라 울자고 기다리다가/ 모른 척 먼
산 보며 뻔뻔 돌아가기로 한다/ 웃어 보렴, 울어 보렴, 기원이
먹힌 까닭일까?/ 골목 안집에도 새 풍선인간 하나 웃자, 울자,
연습 중이다/ 세우기도 전에 설 뻔하다, 엎어지다, 오만상 찌
푸리다/ 납작하게 몸을 눞혀비 사이로 빠져 나온다, 선다/ 오,
얍삽한 변신, 재빠른 동작/ 경탄하는 사이, 이 골목 저 골목
우루루루루 따당땅/ 숨어있던 풍선인간들 달려나온다/ (중략)
- 시 <인간풍선> 일부
이 시는 알다시피 도시의 번화가 상점마다 고객들의 시선을 끌고자 풍선을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어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며 온갖 자태를 지어내고 있다.
그러한 몸짓과 표정이 이 시인의 눈에 비쳐지는 것은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주듯 있음을 느끼면서 시로서 토하고 있다. 그러한 족속들을 일일이 나열하면서 이념풍선, 질서풍선, 신앙풍선, 신조풍선으로 구분하여 나아가서는 앉아! 일어서! 바로 섯! 정신차렷! 라고 호령하지만 흰 놈, 검은 놈, 누런 놈, 점박이 놈, 동네 개들 다 나와 으르릉 으르릉 이래도 저래도 소리지른다 라고 이 시대의 인간들을 풍선인간을 통해 풍자하며 나무라고 있다.
신진 시인의 시집 『석기시대』에서는 이 시대의 표정들을 진단하며 한없이 시로서 마음껏 토해 내고 있는데 그동안 말 못할 사연들을 속 시원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시인적 기질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 그리고 가슴으로만 묻어둔 시인들과의 사연들도 토로하고 있는데, 그 시가 바로 혁명 시인이라 일컫는 <개똥같은 시인 임수생> 이다. 이 시는 그의 장례에 부쳐 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퍽 긴 장시이다.
한 시인이 죽었다. 지난봄의 일이다/ 그가 죽었으니까, 이젠 끽소리
못할 거니까 하는 말인데/ 그는 시 같지 않은 시를 쓴 시인이었다/
그래, 그는 시인이랄 수 없었다/ 마음을 감추고 낯설게 말을 꾸미는
시인이 아니었어/ 멀쩡한 대낮에도 꾸밈 없는 꿈을 꾸는 시인이었지/
개똥같은 시인 임수생/ 아무렴, 시인이고 말고, 아니면 말고//임수생
시에는 언어가 없고 상상이 없다고?/ 그게 아닐 걸, 시인들이 시라는
말로 사람을 속일 때에도/ 그는 제 부랄 하나 가리지 않는 말을 상상
했어/ 시인들이 정신 나가서 벽에 똥칠을 해댈 때에도/눈 바로 뜨기,
맨 정신으로 앞장서기가 그의 꿈이었어/ 뭣 좀 가진 것들이 독선의
길에서 독점의 독박을 쓸 때에는/ 허약한 사람들 사이에 다리가 되어
버티는 언어가 되었다/ 그러므로 시인이 진실로 꿈꾸는 인간이라면/
임수생, 그가 시인일 수밖에 없었을지 몰라/ 처자를 굶겨 내몰고/ 사
형선고를 받거나 밥 먹듯 복역을 하지는 않았지만/ 재물 쌓기 포기하
고 허욕을 가림으로 그는 상상과 언어를 지켰어/ 세계인의 헌장 제1조
를 위해/ 독선과 독점에 대해, 생시에도 몽중에도 혁명을 꿈꾸었다/
그가 죽었으니까 비로소 하는 말인데, 그는 시인이었어/ 넋두리 같은
그의 언어가/ 직설로 쏟이지던 그의 분노가 우리의 진짜 상상이었거든/ 그는 알고 있었을 거야, 그가 진짜 시인이란 사실을/ 이 땅의 나머지
시인이 개똥같은 것들이라는 사실을, 나중에는/ 그 자신 개똥이 되기로 작정했을 거야, 고 임수생 시인. (중략)
-시 <개똥같은 시인 임수생> 일부
이 시가 갖는 의미가 매우 크다. 고 임수생 시인은 폐암말기로 2016년 3월 7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부산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임 시인은 부산일보 기자를 거쳐, 국제신문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끝으로 퇴직을 했다. <시와 자유>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부친이 남로당 간부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그는 언제나 빨갱이 시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그의 시는 직설과 구호적으로 언제나 위정자를 향해 내 뱉는 위험수위에 도달하고 있었다. 시의 혁명을 부르짖으며, 그의 시는 시가 아니라고 시인들의 핀잔을 들었지만 평생을 그렇게 자기의 고집대로 시 아닌 시를 쓴 시인이었다. 신진 시인하고는 만나면 막역한 선후배 사이는 아니었는데 신진 시인이 선배시인들에게 대립한다고 선배들로서의 불만이 있었다고나 할까.
이런 임 시인을 그가 죽었으니까 하는 말인데 하며 쓴 이 시가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며 살았을 적에 만나서 술 한 잔 더 나누며 풀었으면 좋았을 텐데 싶다.
신진 시인도 ‘만나지 못할 때에도 그리웠던 선배’라고 임 시인을 술회하고 있음을 볼 때 두 분 모두다 시인은 역시 시인이구나 하고 느낀다. 이 시를 임 시인이 저승에서 읽는다면 진정한 내 마음을 알아줘서 너무나 고마워 할 것 같다. 이 시는 시인들이 꼭 읽어야 하는 시 창작의 교과서로 남았으면 한다.
신진 시인도 나이가 들어가니 다가올 죽음 앞에 대비라도 하듯 <수목장의 노래>라는 시를 내놓았다. 내 주위의 선배 시인들이 칠순만 넘으면 모두들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늘 만나면 하는 말들이 ‘내가 살면 그 얼마나 살라고’를 늘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그 올곧았던 시인의 기개는 다 어디로 가고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신진 시인은 이왕 죽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이라면 그가 평소에 자연 생태보호에 앞장서 와서인지 수목장을 원하고 있다. 이 시를 보자.
방 한 칸, 밭 한 뙈기 없이 서성거리며
집이고 땅이고 사재는 자 시기하였으나
그래, 이제 되었네, 내게도 있네
머리는 하늘에 닿고
다리는 열 보 너머 개울까지 닿거니
낮이면 새들의 전국노래자랑
밤이면 별들이 세상일 매일 매일 물어온다네
랄랄랄랄라, 하늘도 땅도 내 눈 안에 있으니
나에게도 잘 나가는 시절이 왔네
조금 늦었을 뿐, 다 가졌네
남의 눈치 살피기 몸에 배었고
적게 쓰고 살기 버릇 되었으니
눈물 삭이며 노래 풀어내던 솜씨
예 놓고 누구 없이 들고 가라 할 것이니
이제 되었네, 나도 귀한 몸, 때 맞춰 왔네
원망할 이, 시기할 이 지킬 것도 없으니
두 발 뻗고 눕기 매일이 편하여라
때 맞춰 자리 잡았네 갖지 못한 게 없네
나 이제 살 만하네
- 시 <수목장의 노래> 전문
참으로 소탈하기만 한 그의 소망을 이룬 것에 무어라 표현하겠는가. 이 시는 가진 것 없어도 편안하고 욕심 없는 시인의 삶,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다. 죽어서 누울 땅을 가졌다는 것이 그에게는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나 이제 살 만하네’의 시인의 넉넉한 안도감 속에 오는 울림은 읽는 이의 마음은 참 찡하게 다가오는 시라고 느낀다.
시집 『석기시대』는 시인이 걸어온 삶의 체험 속에 독버섯처럼 자리한 사회의 부조리, 인간성 회복을 위한 각종 피폐에 대한 시인의 엄숙한 경종과 그리고 자연과의 친화 속에 생태보호를 위한 인간이 해야 할 마땅한 도리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값진 시집이다. 이 서평에 다루지 못한 시편들도 모두가 우리 인간에게 해당되는 시로서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끝으로 아직 식견이 부족한 내가 서평을 쓰면서 혹시 선배 시인의 시를 망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앞선다. 그의 시 <넉넉한 지구>를 읊조리며 이 글을 맺는다.
“땅은 넓다/ 혼자 살지 않게 다면// 먹을거리 넘친다/ 혼자 먹지 않겠다면// 얼마든지 잠 잘 집 있다/ 혼자 눕지 않겠다면// 지구는 넉넉하다/ 혼자 사랑하지 않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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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명선/1951년 부산 생. 1983년 풀빛 문학무크 <문학의 시대> 제1권 등단. 시집 <고무신> < 반골> < 대포 한 잔 합시다> <절망이여, 안녕> 등 5권. 경남매일신문 문화부장, 부산펜클럽 회장 등 역임. <김민부문학상>, <부산시인협회상> 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