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시/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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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처
신진, 『미련』, 시산맥사, 2014.4
따라하는 나이
외로운 사람 곁에 앉으면
나도 외로운 나이
그리운 사람 곁에 앉으면
나도 말없이 그리운 나이
골목골목 만나는 얼굴들이며
창문마다 출렁대는 이름들이여
바람결에 사람 곁에 앉았노라면
스쳐 지난 사람도 그리운 나이
잊었던 얼굴 그렁그렁한 눈빛
글썽글썽 따라서 목메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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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처
신진, 『풍경에서 순간으로』, 도서출판 북인, 2010.12
자유의 몸
누가 쌓은 흙더미일까?
잡목 숲 걷다 만난
허물어진 흙더미.
이미 어른 키 넘는 솔이 자라고
웃자란 개옻나무 길을 막는다.
들짐승이 파헤친 귀퉁이 맨살에는
뱀 굴이 깊다.
처음 봉분을 쓸 때에는
그래도 여럿이 따랐으리라.
따르던 사람들 갈라지고 흩어지고
아무도 찾지 않는 때 되어
굴러온 바위 마침내
박힌 돌 밀어 내었으리.
비로소 묵은 짐 벗고
허물어진 흙더미
이제 자유의 몸이 된 것일까?
개망초 꽃, 쑥부쟁이 꽃 둘러대고 앉았다가
점잖은 듯 뒷짐 지고 마을을 돈다.
휘뚜루마뚜루 쥐불 흔들며
붉나무 이파리, 개옻나무 이파리
불 칠하고 돌아다닌다.
나직이 사람 불러 세우고는
종적 감추고 없다.
태풍 매미 지나고
태풍 매미 지난 지 이틀
추석절 마을은 정전.
쓰러진 나무 일받기고
부러진 대문 수리한다.
딸 혼사 앞둔 이장은
날아간 용머리 찾으러 다닌다.
초속 오육십 미터의 강풍
이파리랑 열매랑 죄 훑어가고
빈 줄기만 서릿발처럼 남겨놓았다.
비바람 어디서 피하고 왔는지
매미 우는 소리 요란하다.
늑골이 놀랐는지, 진통제 찾다.
텔레비전이 어둡다. 밥상이 어둡다.
낮 기온은 아직 30도.
냉장고마다 음식 상하고, 마을 어둡다.
-사람들 원망하고 탄식하리라, 하며
늦은 마실 나서니 웬일.
어둠 속에 소근 소근
깨밭, 고추밭에서 땀 흘리는 사람 소리.
지씨며, 강씨며 그 부인네
이 허옇게 뽕짝 부르며 들일 설거지하고 있다.
숨었다 나온 보름달
예안 들 구석구석 바삐 비춘다.
호박농사
텃밭농사 십 년여
호박 옳게 거둔 해 없다
남의 집 언덕배기 축담 위에는
국밥집 솥 밑 만한 호박덩어리
다투어 금줄 걸고 매달리는데
좋은 터 골라 모신 우리 집 호박밭
애호박 시절부터 쪼그라든다
주인이 박복하여
넝쿨째 복 들 리 없지, 부은 양 하니
아내는 복 없다는 말에 트집 단다
이파리 데쳐 쌈 먹고 애호박 된장 지지고
전도 여럿 부쳐 먹지 않았느냐고.
그래 그렇겠다
주인이 박복하여 호박 농사 안 된다 치자
혼자 웅크린 채 넝쿨 열매 달기는커녕
볕 한 줌 남 안 주고 떨며 사는 꼬락서니
나를 파종한 주인 계시다면
그이는 얼마나 부어 계실까?
말과 침묵
침묵하렴
지상의 모든 말을 다한 듯이
말하렴
지상에 내놓는 첫마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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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처
신진, 『녹색엽서』, 시문학사, 2002.10
작은 것 되리
나는
너무 작아서
누군가 받든다 해도
더 높이 들 키가 없네.
나는 너무 작아서
누군가 어둠으로 가린다 해도
채 가려지지 않으리.
발목까지 밟히는
겨울 산 낙엽들
한 잎 한 잎 부숴진다 하여도
머지않아 새싹으로 다시 살아나고
다시 죽고 다시 살아날 것이지만
나는 너무 작아서
스러져 한 번 가서는 오지 않으리.
귓전에 불고 간 겨울바람
스스로 몸을 덥혀 다시 오고
더운 바람 목청을 식혀 다시
휘파람으로 오겠지만
나는 너무 작아서
돌아올 꿈 꾸지 않겠네.
아름드리 소나무야
너는 푸르고 커서 알겠구나
푸르고 큰 것이 얼마나 거짓되는지.
아무따나 퍼질러 앉은 너럭바위야
너야말로 오랜 세월 다 알겠구나
오랜 것이 얼마나 욕된 것인지.
죽어서도 나는
작은 것 되리
세월 지나 누군가 나를 그린다 해도
이름도 얼굴도 남지 않으리.
눈 뜨지 않고 말하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작은 것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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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처
신진, 『강』, 시와 시학사, 1994.3
시장골목
시장 길에서
모르는 사람과 어깨 부딪히기
즐거운 일이다.
부딪히면서
부딪히는 걸 잊는다.
모르는 사람끼리 어깨 비키기
또한 즐거운 일이다.
아슬 아슬 어깨 비키며
비켜가는 줄 모른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과 나는 함께
깨끗이 닦은 버섯들이
입 맞추는 모습 보았다
몸 잘 닦은 마늘 떼의
엉덩이 흰 살 보았다.
모르는 사람끼리 어깨 비키며
손잡고 하나 둘
구령 맞추지 않아도 구령 맞춰 걷는 모습
보이지 않아도
예쁘다 모두들
예쁘다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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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처
신진, 『멀리뛰기』, 민음사, 1986,8
멀리뛰기
산 위에 올라
멀리뛰기를 한다.
두 다리 모아 구부리고
개암 씹던 힘까지 다리에 뻗어
어엿사, 땅을 찬다
구름은 흘러서 어디로 가나?
가을잎 흩어져 어디로 가나?
어디 나도 멀리 한 번 뛰고 싶구나
먹은 것도 없는데 천근만근 몸은 무겁고
어엿사, 차차
멀리 뛰어도
두 다리는 제자리서 떨어질 줄 모른다
옷이 젖는다, 땅이 젖는다
두 다리를 모은다 어엿사 땅을 찬다
두 다리는 떨어질 줄을 모르고
구름은 흘러서 어디로 가나?
가을잎 흩어져 어디로 가나?
아아, 꼭 한 번 뛰고 싶구나
화근내 나는 지구 밖까지
한 자 더 뛰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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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처
신진, 『목저 있는 풍경』, 아성출판사,1978.3
가을
-목적있는 풍경
독(毒) 오른 독사 한 마리
얼레 떠난 연(鳶) 하나 물고 있다.
연(鳶)에서 솟아나는 수만(數萬)의 무지개
유리잔 한잔에 가득히 괸다.
멀리 크레마뇽인이
손 가득히 고이는
황혼을 바라보고 있다.
일어나 보니
일어나 보니
내 비워 두고 잠든 방에는
맑은 아침공기 넘실거리고
햇볕은 아침공기를
적당히 구워내고 있었다.
볕은 여문 살에서부터 흘러
빈 방 가득 적시고
쏟아지는 재즈의 마디마디서
한 소절씩 풀리는 고전 음악.
오, 어젯밤엔 우연히도
엉겅퀴 씨앗 하나 묻어 왔구나.
틈을 내어 보면
우리들의 가난한 삶이란 것도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제가끔의 둘레를 뻔히 밝히고 있던 것을
아침 한때 치솔을 물고 나서면
가난한 인생도 새로 피어 눈인사하는
가까운 형제인 것을
얻어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우린 빈 방에서 잠들기를 무서워하는 것일까?
일어나 보니
내 비워두고 잠든 방에는
맑은 아침공기 넘실거리고
쏟아지는 재즈의 마디마디서
한 소절씩 풀리는 고전 음악.
오!
어젯밤엔 우연히도
엉겅퀴 씨앗 하나 묻어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