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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귀가』, 신생, 2005.9
촌놈 되자면(2017.부분수정)
입이 궁금한 날엔
마을돌이 만물 트럭 시간 맞추어
냉동 오징어며 냉동 전어 오천 원어치 산다
물에 풀어 얼음 씻어내고
칼집 듬성듬성 대장균 비브리오 균 죽인다
괜찮을까, 의심하는 이 있으면
소주하고 먹으면 탈 없다고 잰다
- 탈이 나더라도 혼자 죽기야 하겠는가?
촌놈 되자면
목숨 걸 일 더러 있다.
어둠속 불빛
까치산 기슭 품 큰 소나무 밑
초여름 밤공기에 온몸 맡기고 앉다.
강 너머 광역시 아파트의 불빛
이국적(異國籍) 여객선처럼 궁금하다.
저 불빛 속에
장사 나간 어미를 기다리는 아이 둘
겉으로 씨름질하며 속으로 밥솥 지키고 있으리라.
저 불빛 속에
늦게 귀가한 젊은 가장의 부은 발
아내가 더운 물에 씻어 주리라.
저 불빛 속에
아비는 사람 모인 자리서 읽을 한시(漢詩)를 외고
아들은 외국가요를 우리말로 적으리라.
또 저 불빛 속에
늦은 시간 베란다에 화초를 심으면서
나이 든 부부 한 쌍 흙 묻은 손 서로 자랑하리라.
그래, 저 불빛 아래
조막만 한 어미 고양이 한 마리 새끼들 흩어질까
혓바닥으로 새끼 품안에 쓸어 모으리라.
눈썹 사이, 겨드랑이 사이
어둠이 남기고 가는 입김 은근하다.
초여름 밤 어둠의 입자들이
까치산 기슭 품 큰 소나무 아래
연분홍 꽃잎이 되어 내린다.
비닐하우스
콜롬부스의 여행에서도
들르지 않은 집, 비닐하우스.
밖이 더울 때 더 덥고
추울 때 더 추운 집.
장난을 금하건만
바람 불면 바람소리 백 배.
미리 내는 집.
가옥대장 밖의 가옥, 비닐하우스.
배추처럼 한 뿌리에 밑 대고 사는
두 가구 여섯 식구
사는 것이 장난 같습니다.눈알들 초롱 초롱 초록색
방울토마토 같습니다.
장닭
박 선생님 가족이랑 평상에서 삼겹살 구워 먹는데 장닭이 알고 암탉들을 불러 모은다. 귀한 고기이니 지가 먹겠지 하고 여나믄 점 던져주었는데 장닭은 한 조각 예외 없이 암컷들에게 양보한다. 암탉이 먹을 동안 자랑스럽게 갈기를 흔들면서 루우 루우 유성음의 노래마저 보탠다. 암탉들은 낼름낼름 받아먹기만 한다. 장닭은 땅에 부리를 박고 원을 그리며 러시아 민속춤을 덤으로 선사한다. 암탉들을 가두고 장닭만 불러 몇 점 따로 주었더니 이번에는 한 점 한 점 물고 가서 던져주고 달려온다.
저 바보, 저 바보!
아내는 수탉이 바보라서 그런다 한다. 내가 귀한 음식 먹지 않고 저를 줄까 지레 겁을 내는 것이리라.
그래도 뒤통수 털이 다 빠져버린 암탉을 보면 마냥 주고 싶은 것이 해묵은 수컷의 심사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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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강』시와시학사, 1994.4
시장골목
시장 길에서
모르는 사람과 어깨 부딪히기
즐거운 일이다.
부딪히면서
부딪히는 걸 잊는다.
모르는 사람끼리 어깨 비키기
또한 즐거운 일이다.
아슬 아슬 어깨 비키며
비켜가는 줄 모른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과 나는 함께
깨끗이 닦은 버섯들이
입 맞추는 모습 보았다
몸 잘 닦은 마늘 떼의
엉덩이 흰 살 보았다.
모르는 사람끼리 어깨 비키며
손잡고 하나 둘
구령 맞추지 않아도 구령 맞춰 걷는 모습
보이지 않아도
예쁘다 모두들
예쁘다 보고 있었다.
음주운전
집에 가기
힘들다
맨 정신으로 사오십 분
다 왔다 다 왔다 해도
더 가야 한다.
집에 가기
힘들다.
한 잔 그윽한 채 이십 분
다 왔다 다 왔다 해도
버얼써 지나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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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장난감마을의 연가』1981.10. 태화출판사
겨울 송충이
겨울밤
아이스크림
아들 두 놈이 잠을 잔다.
은백색 망아지
잔등에서 부숴 지는
십구공탄의 금 비늘
분노의 그림자
달게 녹는다.
천막집 소주와
닭 내장 구이의 잔해를 떨며
아비는 옷을 벗는다.
천근만근 누르는
어둠의 큰 엉덩이 밀치며
열세 평 전세 아파트, 밤 내
오므렸다 펴고
오므렸다 펴고
푸릇푸릇 송충이 애벌레처럼
아 내
몸은 섞지 말자고
발자국 소리만 나눠 듣자고
손끝만 잡아도
못 볼 거라고
다시는 아무것도 못 볼 거라고
몸 사리던 그대
그 몸 사림으로 사내 꼬셔 눕혀두고
오늘은
밥 끓는 소리 헤아리면서
손깍지 끼고 앉았네.
아내의 장롱
우리방 오동나무
장롱 빼닫이 안엔, 혼행(婚行)날
한 번만 입은 아내의
모본단 치마 저고리
그 밖에는 그늘뿐이다.
노래할 자리마다
시작만 하는 아내의 노래
그 끝은 내가 부르는 법이지만
따로 장롱속 그늘에도 쌓였다가
달빛 와 닿는 밤이면, 그 노래는
장롱 빼닫이 열고 나비로 날아
나의 자리와 또
내 아들의 자리마저 일러준다.
열어보면 빈 장롱의 그늘은
가난한 아내의 예쁜 브로치
반짝이는 모양도 비추고
웃채 어머님의 지목 장롱 빼닫이
떨어진 귀도 찾아 연금(鍊金)을 한다.
그래서
여닫을 일 없는 장롱도
저로서는 그럴 일이 노상 있는 것처럼
꾸준히, 열고 닫는 티가 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