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시

생태시/신진

신기루(진) 2017. 11. 2. 11:57

-----

 

신진, 미련, 시산맥사, 2014.4

 

 

나무의 이름

 

나무의 이름은

봄볕

숲 해설사는 생강나무와 산수유나무의

가지의 결과 꽃잎의 수를 구분하고

탐방객들은 좌뇌 깊이

종과 목과 이름 새기고 갈 길 가는데

그래도 내 이름은 봄볕

어깨에 손등에 사타구니에

나무는 아른 아른 제 이름을 새긴다

 

나무의 이름은

바람소리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탐방객들은 대뇌피질 타전 후 지나가는데

새순 오물오물 나무는 나긋나긋 손을 흔들며

내 이름은 바람소리

입술로 손으로 사타구니로

제 이름을 말한다

 

다른 음역(音域)에서 빛나는

나무의 이름

볕의 주문(呪文)이다가 바람의 유혹이다가

그늘의 서늘함이자 뜨거운 함성

 

나무의 이름을 찾아

탐방객들은 나무의 곁을 떠나가는데

나무는 시시각각 탈바꿈하는

제 이름을 읊조린다

 

창문

 

집 나간 개 기다리느라

대문 닫지 못했네

열린 대문 보느라

창문 닫지 못하네

 

 

 

작은 눈사람

 

삼정빌라와 청구아파트 사이 근린공원에 누군가 만들고 간 눈사람인지 만들다만 눈사람인지 혼자 밤을 새고 있다 밤을 새는지 밤새 녹는지 밤새 자라고 있는지 머리 하나에 몸통 하나 하얀 작은 눈사람

인지, 팔 다리 잘리고 남은 것인지 남녀 화장실 하나에 관목 스무 그루 둘러선 근린공원 지키고 있다 아니 버려져 있다

이 따위 빈 뜰을 어느 병정이 지키랴? 느티나무 두 그루 이팝나무 열두 그루 작은 아이 눈사람 인간 내장 돼지 지노가 꿀꿀꿀 지키고 있다 눈 코 귀 입이 자라지 않은 3등신 눈사람 머리하나에 몸뚱이 하나가 지노 지노 지노 지노 말한다 아니 소리 지른다 아무도 듣지 못한다

중국식 체조를 하던 노인 넘어져 울던 아이 소리 듣지 못하고 잠이 든 시간 관목 스무 그루에 벤치 둘, 화장실 하나 그리고 복제 돼지 지노가 그의 소리를 듣는다 소복 소복 소복 소복 지노 지노 소리 들린다 작은 눈사람이 세상에 전하는 소리 밤 깊을수록 또렷하구나 지키는 소리인지 버려진 소리인지 자라는 소리인지 사라지는 소리인지 하얗게 소복소복 가라앉는 하얀 눈사람

 

 

 

행락(行樂)

 

투톤컬러 SUV 타고 갑이 달린다

인형 셋이 더 타고 있다

달리는 승용차에 을이 묻혀 있다 을의 승용차

새까만 여동생 하나 묻혀 있다

중앙 분리대 위에 사나이 하나 팔짱잡이 하고 서 있다

비옷을 입고 있다 기어가는

승합차에 끼여 병이 단풍 구경하고 있다

중앙선이 사라지고 차가 차를 민다

온천마을 단풍숲길

방사선 방어복을 입은 사나이가 내려다본다

운전자 없는 쓰레기 차 길을 막고

매립장 가는 길을 묻는다

국기 게양대에서 알몸의 사나이가 펄럭거린다

수도꼭지를 틀면 오오오오

걸어나오는 코끼리 세린게티의 푸른 입김

수도꼭지 뜨겁다 사나이 증발하고

방사능 방어복 펄럭거리고 있다

온천에 몸을 태운 갑을병의 겨드랑이에서

비닐 타는 냄새가 난다

서산에 해 기울고 펄럭거린다 기어가는 차량마다

지장보살 인형 셋 더 타고 있다

 

 

 

-----

 

신진, 녹색엽서, 시문학사, 2002. 11

 

 

 

사람들은 세상을 어둡게 본다

 

사람들은 세상을 어둡게 본다. 방안을 거실을 어둡게 보고, 노동을 휴식을 어둡게 보고, 만남과 헤어짐을 어둡게 본다.

그래서 모두들 불을 켜고 산다. 현관에 켜고 거실에 켜고, 만남에 헤어짐에, 잃고 얻음에 불을 켜고 살핀다. 돌을 깨어 돌 속의 어둠을 떨고, 산을 뭉개어 흙 속의 어둠을 떨고, 서로의 가슴에 금을 긋고 속을 살핀다.

구석구석 어둠 찾아 불을 지르는 사람들아, 죽살잇길 죄 풀어서 삼파장 불빛 아래 화안하게 펼쳐 보이는 사람들아, 그대 어둠을 본 적 있는가? 불 없이 어둠을 본 적 있는가? 어둠이 즐거운 어둠, 길이 없어도 왕래하고, 자 없이 저울 없이도 나누는 어둠, 흙과 흙을 잇고 바위와 바위를 받치며 그대 불빛의 빛을 빛이게 하는 어둠, 더 낮은 어둠을 찾아 오늘도 어둠을 긁는, 그대 어둠을 만나 보았는가?

사람들은 세상을 어둡게 본다. 한사코 불을 켠다. 어둠은 세상을 밝게 보고 있는데.

 

 

 

다시 무주구천동을 찾아

 

부산서 무주까지 멀고멀었던 산골. 버스 타고 갈아타고 걷고 걸어 찾았던 구천구비 맑은 계곡 무주구천동. 어린 마음 혼자되어 속앓이 풀어놓던 구천동 계곡. 30년 세월 지나 다시 찾으니

화장실이 세련되다.

양쪽으로 차도(車道) 뚫리고

제멋에 좌선(坐禪)하고 와선(臥禪)하고 기대앉았던

구천동 양어깨, 다 닳고 없다.

주차금지 야영금지

입산통제 수영금지

다시 오르면

취사금지 출입금지 줄사다리 사용금지

가축 방목금지 자연물 채취금지

가슴을 죈다.

생육신 김시습이 비로소 안심했다는

안심대,

삼십년만에 친구 마중 나온 덕유 상봉 향적봉이

안심하지 못하고 웃지 않는다.

이속대(離俗臺) 너머

조촐하던 백련암은 백련사 큰 사찰되어

단장이 대단한데

덕유산 온유한 덕도 향적봉 깊은 향도

무주리조트 스키 날에 빤질빤질 닳아 있다.

 

 

 

황 사

 

해마다 날이 말라 건조 주의보, 가뭄 경보 떠드는 동안에도 봄은 발정한다. 늙어빠진 살 어드메 물 한 모금 숨어 있었던지, 산수유 노랗게 첫 피서답 걸면 복숭아꽃 들판 가득 뒷물내 흩고 쑥이며 냉이, 씀바귀 끈질기게 들을 쫓아 다녔다. 물이끼는 물고기 꾀느라 엉덩이 살랑거리고, 노인은 소 몰고 나와 다시 흙 되는 놀이를 한다. 봄의 발정은 순교의 피보다 난만하다.

잠시 경보 없는 황색 경보. 시도 때도 없는 누르테테한 먼지바람. 돋던 싹이 머리 숨기고 피던 꽃이 대피한다. 봄 하늘이 유리그릇처럼 깨어지고 떨어지고, 아우슈비츠 나치의 샤워장의 비명소리들 가까이서 들린다, 노랗게.

 

 

 

백 로

 

중국 영공인지 인근 공해상인지 미국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가 몸싸움 끝에 추락, 지상의 모든 유인원이 정찰기 반환 몸싸움 구경하는 동안

우주 왕복선 엔데버호가 케네디 우주센터를 떠나 국제 우주 정거장에 로봇 팔을 장착하러 간다.

같은 날 이라크는 영공을 침범한 이란의 무인 정찰기를 지대공 미사일로 격추시켰다. 전 날 이란은 이라크 영내의 이란 반군 기지에 56 발의 지대지 미사일을 퍼부어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여름새 백로가 예년보다 이른 더위를 좇아 이삼십 일 일찍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우주선도 미사일도 갖지 않았다. 더 넓힐 하늘도 없고 빼앗길 땅도 없다. 날 맞추어 하늘에 뜨고 날 맞추어 땅에 내린다.

언젠가 우리도 미련 없이 닿았다가 미련 없이 떠나는 백로였으리라. 아니면 물 속 바위틈 물살 따라 경주하다가 백로의 깃 하나, 깃 위에 반짝이는 때깔이었으리라.

이스라엘의 미제 미사일이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난사하는 동안. 미국의 평화용 미사일 방어체제에 우방마저 한 방 맞고 어안 벙벙해 하는 동안.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백로가 날아오는 동안.

 

 

 

-----

 

 

신진, 시와시학사, 1994.4

 

 

물고기회

 

물고기회 먹자고 낚시를 한다.

주먹만 한 붕어 몇 건져 올린다.

비늘 떨고 아가미 떨고

내장을 헹구며 디스토마를 잡는다.

둔각의 등뼈 마디마디 헤집어

수은, 납을 도려낸다.

살점에 박힌 부영양 오물, 방카A유 찌꺼기

카드늄을 걷어낸다.

마침내

초고추장 병을 열고

물고기를 먹는다.

기억에 절은 손가락만 빨았다.

 

 

 

희망소비자가격

 

물고기가 죽어 있다.

죽음이 낯설어서

쓰레기 밭 분뇨덩이에 낯을 가리고 있다.

팔뚝만한 주검의 머리카락이 보인다.

겹겹이

젖은 비닐에 코를 막은 채

싸늘하게 쏘아보는 플라스틱 눈빛이여.

학의 다리 길어도 벗어나지 못하리.

어젯밤 꾸억꾸억 딸꾹질 소리

시나브로 명치끝을 찔러대더니

-희망소비자가격 180

어느 놈이 그에게 라면 상표를 붙이고 갔나?

 

 

 

땅파기

 

노인 둘이서

땅을 파고 있다.

시멘트 포장을 뜯고

아스팔트를 찢는다

말라붙은 비닐용기, 스티로폼 조각

떡이 된 땅을 판다.

조각난 유리, 플라스틱 터진 살이

탄광처럼 엉켜 있다.

치익 칙 독한 냄새가 솟고

드디어 가스가 터져 나온다.

시꺼먼 기름 거품을 숨 가쁘게 뱉는다.

쓰러진 노인이

버즘투성이 다른 노인에게 말했다.

-여기……, 여기……, 강이 있던 곳이야.

 

 

 

부동강

 

서 낙동강 이제

얼지 않는다.

겨울이면 짚여물 섞어

얼음 외투로 몸을 감싸던 낙동강

상동에서 물금까지

식만에서 둔치도까지 임자 없는 얼음 땅 놓아

배 없이도 강 건넛집 구들 목에 사람 모으고

밤이면 물오리 가마우지 짝지어 잠들게 하던

서낙동강

수 십 년래 추위에도 이제 얼지 않는다.

팔 백 리 팔 다리 어깨

숭숭 구멍 파고 지져대는 불기름

계절 없는 성폭행.

드드드 전신의 관절 떨면서

뜨거운 신열에 몸살하는 서낙동강

살을 에는 추위에도 베 조각 하나 못 걸친 채

내 집까지 찾아와 몸부림친다.

밥상에서 파닥거리고

샤워기 안에서 몸부림친다.

이불 속까지 상한 기름 비린내 잠을 찌른다.

겨울이면 얼음 외투 덮고

배 없이도 강 너머 사람 모으던 서낙동강

그의 묘비명만이

도로교통지도에 남아 있다.

 

 

 

바다 물밑을 가며

 

물밑을 가면

물이 있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국경 없이 살아가는

따개비, 성게, 불가사리

정적에 귀 데인다.

최소한의 말씀으로 법 없이 살아가는

볼락, 망상어, 술뱅이, 도다리

물밑을 가면

물이 흐른다

물 따라 허물 벗으면

꽃잎 속 같은 뺨으로 내장째 차근차근 나를 헹군다

그랜드 캐니언과 시리아 사막*

서로 기대어 눕고

태양계 건너서 안드로메다 베타성

물밑 통화중이다.

물을 벗고 물밑을 가며

온 몸 벗고 물밑을 가며

숨 한 번

그렇다, 숨 한 번 쉰다.

* 미국과 이라크의 페르시아만 전쟁

 

 

짖기

 

 

아침부터 저녁까지

개가 짖는다.

개야, 개야, 이 개야.

 

신라의 달밤에

내가 짖는다

아야, 아야, 아야야.

 

 

 

 

-----

 

신진, 멀리뛰기, 민음사, 1986. 9.

 

 

멀리뛰기

 

산 위에 올라

멀리뛰기를 한다.

두 다리 모아 구부리고

개암 씹던 힘까지 다리에 뻗어

어엿사, 땅을 찬다

구름은 흘러서 어디로 가나?

가을잎 흩어져 어디로 가나?

어디 나도 멀리 한 번 뛰고 싶구나

먹은 것도 없는데 천근만근 몸은 무겁고

어엿사, 차차

멀리 뛰어도

두 다리는 제자리서 떨어질 줄 모른다

옷이 젖는다, 땅이 젖는다

두 다리를 모은다 어엿사 땅을 찬다

두 다리는 떨어질 줄을 모르고

구름은 흘러서 어디로 가나?

가을잎 흩어져 어디로 가나?

아아, 꼭 한 번 뛰고 싶구나

화근내 나는 지구 밖까지

한 자 더 뛰고 싶구나.

 

 

 

 

이 닦기

 

아가야, 이를 닦아라

잠자기 전에는 이를 닦아라

네가 먹는 아침식탁 점심 혹은 저녁의

탐욕의 녹

목구멍을 넘기 전에 닦아내어라

이를 닦아라, 아가야

웃음마다 접히는 검은 눈주름

목청에 남아 있는 굴욕의 노래

깨끗이 깨끗이 닦아 내어라.

잠 깬 아침에는 다시 이를 닦아라

어제의 쌓은 꿈, 내일 이룰 꿈

타고 난 무늬로 닦아내어라.

 

 

 

엘리베이터

 

눈을 감는다.

고성능 자동 태엽이 내 눈을

감아올리는 순간

넥타이가 풀리고

()에겐지 귀()에겐지 인사를 한다.

미안합니다

종일 입었던 저고리 바지 맞지 않고

누구도 없는데 부끄럽다.

눈을 감고

5

4

3

2

한 꺼풀의 피부가

스타킹처럼 흘러내린다.

1

고성능 자동 태엽이 또 다시

눈을 감는다.

 

 

 

 

------

 

신진, 장난감마을의 연가1981.10. 태화출판사

 

잡새 웃는다

 

저 잡새가 무엇을 보고 웃는가.

() 물 한 수통 차고 땀 흘리는 새벽 등산길

너니난실네요 네루난실네요

재수 없이 잡새 웃는다.

조간신문을 들고 입가의 빵부스러기 훔치며

50동 잿빛 시영아파트 저마다 골똘히 나서는 길을

네루난실네요 너니난실네요

무슨 까닭으로 손뼉 두드리며 웃어대는가?

하루를 뻔히 내다보고

밤새 닦은 구두 위에 장미꽃 피우며

의연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새야, 잡새야 너는

간단하게 웃고 마는가?

그러고 보니 지금도

네루난실네요 네루난실네요

저놈의 잡새가 웃어쌌는다.

 

 

 

회색 개미

 

해맞이 아파트 905호 도어 벨 곁에서 만난

개미 한 마리

그의 백화현상(白化現狀)이며

끊어질듯 끌고 가는 연약한 허리

손 그림자에도 사지(四枝)를 보살피는

불안한 생명

키보다 큰 불안과 의심의 회색 그림자

담어(蟫魚)처럼 허우적거리며

철근 콘크리트의 견고성을 진단한다

너도 살아라

바람에 다치고 달빛에 꺾이는 회색 생명, 개미

죽음이 아닌 채 꿈틀거리고 있나니.

 

 

 

----

 

 

 

신진, 목적(木笛) 있는 풍경,아성출판사, 1978.3

 

 

 

유혹(誘惑)

 

이젠

오너라.

 

잠시 의자를 밀어 놓고

이름 있는 것들의 낭하를 건너

이젠

오너라.

 

올 때는 아무도 더하지 말고

()만 보면서 오너라.

 

박달나무 방금 그른 산() 물을

산 채 마시고

한 열흘

나뭇잎처럼 흥청거리기도 하면서

기침하고 싶은 너의 간장(肝臟)

바람 쏘이고 가거라.

 

열여섯 살 바람이 사는 골짜기

둥지마다 황금빛 날짐승 알이

동굴에는 김현랑의 어진 아이가

햇볕 쬐고 있단다.

햇볕

쪼이고

있단다.

 

예서 한 열흘

음악이 되어서 놀다 가거라.

 

이름 있는 것들의 낭하를 건너

이젠

오너라.

 

*김현랑은 삼국 유사 제 5권 김현감호에서 호랑이가 분신한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했다.

 

 

'생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시 혁명본색  (0) 2021.10.17
맨처음/시집 석기시대/신진/한겨레신문  (0) 2019.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