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미련』, 시산맥사, 2014.4
따라하는 나이
외로운 사람 곁에 앉으면
나도 외로운 나이
그리운 사람 곁에 앉으면
나도 말없이 그리운 나이
골목골목 만나는 얼굴들이며
창문마다 출렁대는 이름들이여
바람결에 사람 곁에 앉았노라면
스쳐 지난 사람도 그리운 나이
잊었던 얼굴 그렁그렁한 눈빛
글썽글썽 따라서 목메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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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귀가』신생, 2005.9
잠자기
사랑하는 이는
눈을 감고 잠잔다.
그리워하는 이는
눈을 뜨고 잠잔다.
사랑도
그리움도 없는 사람은
몸부림친다.
사랑이 없는 땅에서
우리는 사랑하면서 헤어진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
사랑이 없는 곳으로 간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순간에도 사랑이여 !
소리쳐 부르지 않는다.
바람이 바람을 사랑하면서
바람이 아닌 데로 불어 가듯이,
눈물이 눈물을 사랑하면서
눈물이 아닌 길로 나아가듯이.
사랑이 없는 길에서
사랑하는 이!
뜨거운 숨결로 사랑의 꽃을 피운다.
사랑이 없는 땅에서
그대의 향기는 나를 채운다.
그대는 내 사랑
모든 나는 그대의 향기를 지난다.
그대의 향기는 모든 나를 훈제한다.
멀찌감치 홀로 남아도
헤어짐이 섬김에 다를 바 없다.
- 사랑이여!
심중에 떠도는 모든 그대를
모든 내가 부른다,
사랑이 없는 땅에서.
서러운 꽃
밤길을 가며
불 켜진 남의 창문을 볼 때마다
불빛은 사랑에 피는
서러운 꽃인가 했다.
불 켜진 방안에서
어두운 밤길의 인기척을 들을 때마다
어둠은 사랑에 피는
서러운 꽃인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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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녹색엽서』, 시문학사, 2002. 11
겨울에는 옷을 벗는다
나무는 겨울에
옷을 벗는다.
어린 싹이 덮으라고
옷을 벗는다.
땅은 겨울에
옷을 벗는다.
흙더러 덮고 견디라고
옷을 벗는다.
사람은 겨울에
옷을 벗는다.
사랑이여, 추운 네가 덮으라고
서로 옷을 벗는다.
맨 처음
세상에서 맨 처음
공중에다 돌을 던진 사람은
새가 되어 공중에 들고.
세상에서 맨처음
물에 대고 돌을 던진 사람은
물고기 되어 물에 들고.
세상에서 맨처음
사람에게 돌을 던진 사람은
사랑이 되어 그의 마음에 들고.
만나지 않은 만남
만나지 않은
만남이 있을까?
기인 긴 지하철 계단을 걸어 나오며
무연(無緣)히 부딪는 어깨와 어깨
무심한 순간에 만남은 비롯되고
왕녀의 유혹에도 귀먹은 나의 어깨 위에
덤으로 내리는 눈처럼 그대
놀라운 친근감으로 내렸네.
만나지 않은 채
내 어깨 위에서 쌓이고 녹고
조금씩 귀를 적시며
내 눈과 코를 열고
마침내 사랑인가, 가슴을 열게 하느니
만나지 않았으나
나도 몰래 너와 나 만나
내 너에게 미안하고 너는 나에게 미안하여
서로의 상처 말없이 닦는 사이 되었으니
그대 이제 내 앞에 가장 만만한 이 되어
길에서도 만나고 집에서도 만나는구나.
그대와의 만남이
만나지 않은 채 이루어졌듯
설혹 우리에게 헤어지는 날이 올지라도
그 헤어짐은 헤어지지 않은 헤어짐이길
나는 바란다.
내 어깨 위에
너울 없는 놀라움으로 녹고 쌓이던 눈처럼
무연히 부딪는 어깨의 체온처럼
그대와 나
만나지 않아도 항시 만나고 있으리라
오늘 그렇게 나는 믿는다.
그대가 차가운 어둠 속에 떨고 있는 날에도
내 몸과 넋의 그림자 다 벗어서
어둠 아닌 어둠 되어 그대 감싸 안으리라
오늘 그렇게 나는 믿는다.
가난 (1)
더 이룩할 것이
없다.
우리에겐 부족한 것이
부족하다.
온종일 마주보아도
그대에게 줄 것이 없고
그대에게 바랄 것 없다.
마주 보면서 텅 텅 비는 마음이여.
우리에겐 마련할 내일이 없다.
가난 (2)
시내에 나가 음악회를 다녀오면
떼 지어 쫓아오는 음표의 물결.
도 하나 레 하나 될 수 없는
나란 얼마나 속된 것인지
자꾸 침을 뱉게 된다.
산 속에서 팔을 괴고 누웠을 때면
한 잎 이파리만큼도 푸르지 않는
나란 얼마나 속된 것인지
그늘에 몸을 숨긴다.
그러나 그대 그리운 시간
나 하나 음악이 되고
산 되고 바다 되어 천지에 가득하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필 필 필 떨어지고
광막한 우주가
우
수
수
진다.
그대 그리는 시간
산이니 음악이니 하는
저따위들! 얼마나 가난한가?
틈 (1)
그에게는 틈이 있었네.
내가 사랑한 이는
그가 아니었네. 그의
틈이었네.
작은 틈에서 큰 틈
다시 더 작은 틈을 찾아
나는 불을 피웠네.
불 피울수록 틈은 더 커지고
틈이 클수록
불은 더 뜨거웠네.
손의 틈, 목의 틈, 가슴의 틈
그의 틈 낱낱이 불붙을 때
나의 틈 함께 불타오르고
그와 나 마침내 하나의
틈이 되었네.
틈 (2)
처음에는 그와 나 사이
틈이 없었네.
내가 그에게 다가가면서
그와 나 사이
이 세상 모든 노래 이은 만큼
틈이 생겼네.
그가 나에게 다가 오면서
그와 나 사이
이 세상 모든 향기 이은 만큼
틈이 생겼네.
마침내 그와 나 사이
더 다가설 틈이 없는
틈이 되었네.
우리 집 가는 길
마누라 어디 갔나, 자식새끼 잘 있나.
쫓아다니다 문득 잃어버린
우리 집 가는 길.
자동차 핸들 잡으면 겨우
가물거리는 우리 집 가는 길.
대동 가는 강둑길 풀빛 푸른데
낙동강 어디 갔나, 강둑 높구나.
가는 길 물어보려니
전화번호 기억에 없고
줄지어 나는 물오리 떼
갈매기 아이디 좇다 깨어진다.
아차, 나를 안에 둔 채 문 잠궜구나.
본네트 살피고 콘솔박스 뒤지며
어디에 있나, 빛나는 나는
반나절 뒤져도 뵈지 않는다.
날은 저무는데, 열쇠를 잃고
아무도 없이 홀로 집에 드는
의젓한 나를 나는 잊었네.
우리 집 가는 길 멀고 멀어라.
금단현상
담배 끊은 지 두 시간. 담배 피운 지 두 시간. 두 시간 삼분. 입이 심심하다. 손이 심심하다.
하얗게 씻은 무, 토막을 낸다. 투명한 채즙이 칼끝에 묻는다.
그대 떠난 지 스물 두 시간. 그대 만난 지 스물 두 시간. 스물 두 시간 삼분. 목젖이 빈다. 머리가 빈다. 가슴이 빈다. 토막 난 무를 썬다. 성 성 썬다. 냉랭한 바람이 인다. 손가락마다 젖는 채즙이 아리하다.
입이 마른다. 가슴이 마른다. 아랫배가 마른다. 담배 끊은 지 두 시간 오 분. 종아리가 삐딱하다. 발가락이 흐물거린다.
무를 썬다. 깍둑 썬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인 줄 아는 여자. 내 목소리 따습고 내 가슴 제일로 의롭게 여기는 여자. 가장 부드럽고 가장 강하다 여기는 여자. 내 깊은 생채기 명주실 바늘로 깁는 여자. 무를 썰고 있다. 만나지 않아야 한다. 그대 떠난 지 스물 두 시간 오 분.
미안하다. 손이 미안하다. 가슴이 미안하다. 썰어진 무 조각 조각 흘러내리는 추억의 냇물. 발바닥이 미안하다.
잘게 썬 무는 무가 아니다. 무가 아니다. 무는 없다. 없다. 없다. 없다는 것은 없다가 아니다. 썬 손가락은 손가락이 아니다. 잘게 썬 가슴은 가슴이 아니다. 살갗이 담 너머 풍선처럼 기웃거린다. 담배 피운지 두 시간 오 분 그대 만난 지 스물 스물 스물 스물 스물 두 시간 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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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강』(시와 시학사, 1994.4)
좋은 날
이제는
좋은 날이 오리라 사랑하던 이.
땀으로 빠지던 그대 짙은 눈썹을
이 밤에는 두 손으로 돌려 주리라
가슴팍에 칼금으로 적던 편지도
이 밤에는 소리없이 지워내리라
오랫동안 우리는 수면이 부족했어
불면의 목청에 화음은 깨어지고
정담은 핏발 세운 채 부은 종다리 끌었어.
오려 붙이고 일으켜 세우면서
우리는 마주 잡은 채
얼마나 혼자서 떨었던가?
한 잠 자고 일어나면 개운하리라
내일은 그대 부디
새로 만난 애인과 함께 걸으라.
나도 일어나 새로운 사랑을 정하여 두마.
열린 단추 채우듯 평상으로 헤어져 돌아오는 밤
언약의 날보다 나는 처음으로 너를 사랑하였다.
미련없는 이별 위에 더 맑은 선물이 따로 있으랴?
포옹하는 손마다 적시던 슬픔이
부어 오른 가슴을 소낙비로 달게 씻고
이제사 네가 비켜 선 땅만큼
소원하던 내 화원 의논없이 가꾸리라.
사랑하던 이여, 안녕
사랑의 날에 다시 만나지 말자
사랑하기보다 헤어지기란
얼마나 무거운 짐이더냐?
좋은 날이 오리라 사랑하던 이.
사랑의 묵은 관습 벗어 던지고
오늘밤엔 너와 나, 잠을 느긋이 자자.
아내
몸은 섞지 말자고
발자국소리만 나눠 갖자고
손끝만 잡아도
못 볼 거라고
다시는 아무것도 못 볼 거라고
몸 사리던 그대
그 몸 사림으로 사내 꼬셔 눕혀 두고
오늘은
밥 끓는 소리 헤며
손깍지 끼고 앉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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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장난감마을의 연가』1981.10. 태화출판사
너는 빛나고
너는 눈을 감추고
내게로 온다.
나무의자 위에 두 손을 모아 잡고
눈짓대신 빈 술잔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술잔을 채울 때
자물쇠 열리는
이진작(二眞勺)
저음(低音)
술잔에 무겁게 떨어졌다.
.......우리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빈 술잔을 놓고 네가 돌아간 후에
별이 되었는지
너는 반짝반작 빛나고 있다.
그래, 네가 별이 되어 빛날 때
나는 밤이다.
눈을 감고 길을 막는 밤이다.
* 이진작(二眞勺) :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이진작이라 할 때는 빠르고 높은 곡조를 이름이니 이진작은 적당히 느리고 낮은 고려가요의 곡조
사랑니를 뽑고
외롭게 무너지는
시간을 보았는가?
홀로 남은 밤
고요히 제 가슴 쪼개어내는
진흙제방의 향기
양귀비꽃 제 살을 찢는
신음소리 들어 보았는가?
오늘 치과의의 핀셋에 뿌리째 뽑혀 난 후로도
끊임없는 모반의
그 흰 이마, 붉은 소톱, 혼백은 생생하다.
나는 가고 싶다.
사랑이 없는 곳으로
조용히 가슴을 열어
무너지는 어둠의 하얀 돛을 보고 싶다.
아픔이 아픔으로 확실하게 살아남고
마취제도 지혈제도 치과의도 이름이 없는
미명(未明)의 땅, 그 곳에 가고 싶다.
사랑니여, 안녕
만나는 시간에 마지막 인사를 하는
그 변덕의 땅에서
스스로 내 가슴을 헤쳐 내리며
북소리로 빨갛게 피어나고 싶다.
춤추고 싶다.
실연(失戀)․1
순이를 만났을 때
나는 처음으로
사람의 눈물을 사랑했다.
순이를 사랑할 때
처음으로 나는
사람의 침묵을 사랑했다.
순이가 나를 떠날 때
떠나는 사람이 남기고 가는 눈물과 침묵을
나는 사랑했다.
미명(未明)의 바닷가엔 따로
백모란 꽃잎이 떨어지고
나는 처음으로 내가 떠나는 법을 배웠다.
순이는
더 먼 나라로 가고
나는 순이를 잊기 위하여, 매일 밤
백모란 지는 소리에 이마를 깨며
날이 새면
철근 고층 빌딩의
차가운 무릎에 앉아 울었다.
낡은 시내버스의 손잡이에 매달려
소쩍새처럼 울었다.
순이야
순이야
잊어주렴
네가 나를 잊어 주렴 순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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